하나의 일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문 하나가 열리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두 발을 들이면 전에는 몰랐던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늘 거기에 있었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 미술 학원을 운영하며 새로 알게 된, 달의 뒷면 같은 세계가 있다.

원장이 되고 나서 알게 된 것들

먼저는 일 년에 두 번(5월과 12월), 원장 교육연수가 있다는 것. 이런 일은 공지를 받았을 때 바로 해치워야 한다. 미뤄두면 다른 일정들 사이에 묻혀 깜빡하기 쉽다. 예전에는 오프라인 강의를 들어야 했다는데, 요즘은 온라인으로 수강하고 연수증을 출력해 제출하면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교육청에서는 학원 운영자들이 해야 할 일들과 갖춰야 할 서류들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더 이상 ‘해야 할 일 목록’에 남겨두고 싶지 않아 주말에 몰아서 수강을 끝냈다. 작은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검색으로 문의하는 어머님들이 많다 보니 인터넷에 업체 등록을 해두었는데, 그러고 나니 네이버 플레이스 담당자라며 걸려오는 전화가 정말 많다. 검색이 더 잘될 수 있게 태그를 수정해 준다거나, 딱 10분만 방문해서 상담받아보라며 원장님은 손해 볼 게 전혀 없다는 강요 투의 요청이나, 정부 지원을 받아서 아이들을 등록하게 연결해 준다거나 등등. 정말 오만가지의 전화가 온다.
처음에는 혹해서 방문 상담도 받아봤다. 그런데 결국 이야기는 하나로 귀결된다. “저희가 마케팅을 해드릴게요. 비용만 지불하시면 됩니다.”
이젠 이런 전화는 거르게 된다.

어머님들의 다양한 요청 사항들과 수업 시간 조절을 위한 연락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기 아이가 매번 잘 도착했는지, 가방이며 실내화 주머니 같은 것을 학원에 놓고 간 것 같다며 확인 요청을 하는 것부터 원비 입금을 제때 안 해주시는 분들께 연락해야 하는 것이나, 1:1로 수업할 땐 몰랐다가 여러 아이들과 수업하니 다른 아이에게 대하는 태도를 보며 놀라게 되는 것. 나르시시즘이 엄청 강한 아이들이 태반이고, 연습 없이 단 한 번에 잘 그리고 싶어 하는 아이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그리겠다고 고집 피우는 아이들까지 마주하다 보면 미술학원의 운영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세계라는 걸 깨닫는다.

아이들은 엄청난 수다쟁이

그리고 또 하나. 아이들은 정말 엄청난 수다쟁이라는 것. 10초도 입을 쉬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와 질문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엄마 아빠의 드라마 취향부터 친구들과의 카톡 대화, 여행 다녀온 뒤풀이 이야기, 쉬는 시간에 생긴 해프닝, 때론 자기 인생의 고민상담이나 “선생님은 왜 미술 선생님이 되었어요?”, “언제부터 미술을 잘했어요?”, “학원은 몇 년째예요?”, “결혼은 한 거 같은데 아들은 몇 명이에요?”, “학원에서 사세요?” 등 당황스러운 질문들까지. 제발 그 질문의 방향이 나를 향하지 말라고 빌고 싶다.

생각해보면 미술이라는 건 참 신기한 시간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그리면서도 동시에 입과 귀는 자유로우니까. 집에 있는 날이면 고양이들에게 한두 마디 건네는 게 하루 대화의 전부인 나에게, 꼬맹이 아이들과의 수업은 새로운 세계였다. 어떤 날은 수업이 끝나면 그대로 방전되어 버린다. 퇴근하고 그대로 침대로 뻗어버리는 날이 아직도 있다.

보여지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생각해 보면 이것은 인생의 진리다. 우리는 늘 보이는 것을 보며 살아가지만,보이지 않는 모습을 안고 살아간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의 미술 수업을 오는 아이들이 조금 더 쉽게 만들 수 있도록 미리 예시작을 만들어 두고, 학년마다 아이들의 진도에 맞춰 바로 다음 수업을 준비한다.

책을 만드는 과정도 비슷하다.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와 독자 한 사람이 보기까지 수많은 과정과 시간이 필요하다. 독자는 완성된 책을 만나지만,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새삼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 다들 자기만의 달의 뒷면을 안고 살아가는구나. 그래서인지 가게 문을 여는 사람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통화하는 전화기 너머의 사람도 전보다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말에도 교육연수 공지는 올 것이고, 광고 전화는 또 걸려올 것이다. 아이들은 여전히 10초도 쉬지 않고 말을 걸겠지.
다만 이제는 안다. 그게 내가 문 열고 들어온 세계의 뒷면이라는 것을.

  • 사진은 뮤지엄 산의 빛의 공간 ‘안도 타다오’와 ‘안코니곰리’ 전.

첫페이지로 이동
인스타로 이동

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Related Posts

“안 슬픈데요” (달의 뒷면_2)

“안 슬픈데요” (달의 뒷면_2)

안 슬픈데요 “안 슬픈데요.” 순간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 아이들과 생존수영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대답이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학원 근처 초등학교에서는 2학년부터 생존수영 수업을 한다고 했다....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하나의 문장을 만나기 위해 한 권의 책이 내게 닿을 때가 있다.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가 내게는 그러했다. 63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었지만, 어느 한 페이지의 문장...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인가 보다

나는 엄마의 아픈 손가락인가 보다

나는 둘째다.위로 세 살 터울 오빠가 있고, 아래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는 1남 2녀 중 샌드위치 장녀. 사회생활을 하며 둘째라고 밝히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아, 역시. 둘째들이 자립심이 강하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