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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벚꽃, 수업 말고~

봄, 벚꽃, 수업 말고

올해의 봄

벌써 4월도 끝을 향해 간다.
시간은 늘 빠르다고 느끼지만, 요즘은 유난히 더 그렇다.

이번 학기에는 일러스트와 디자인 수업이 늘었다. 생성형 AI가 이미지를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는 아이들이 늘어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원이 많아 분반까지 했으니, 한 과목을 두 반이나 따로 수업한다.

디자인과 수업은 ‘책을 실제로 만들어보는 수업’을 요청받아 진행하고 있다.
편집 디자인 툴인 인디자인을 다뤄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인쇄용 파일로 최종본을 만들고, 종이를 고르고, 인쇄소에 맡기고, 결과물을 받아보는 과정까지 경험하는 수업이다.

화면 속 파일이 손에 잡히는 ‘실물’이 되는 순간,
아이들이 받는 감각은 분명 다르다.

모니터에서는 괜찮아 보이던 이미지가 인쇄에서는 아쉽게 표현되기도 하고,
화면에서만 보던 글씨 크기가 이렇구나 하며 느껴보기도 한다.
얇은 중철 제본부터 책등이 있는 무선 제본, 칼선으로 형태를 만드는 작업이나 접지 브로셔까지. 제작 과정을 이해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순서’를 고려한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 있다.

봄, 봄, 이렇게 봄

지난주,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려고 시동을 켜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저… 지금 흰색 차 가시려는 거죠? 저 OO입니다. 저 취업해서 학교 왔는데, 교수님 수업 중이시라고 해서 기다렸어요!”

차 옆으로 뛰어오는 아이를 보며 금세 알아봤다. 수업을 열심히 듣던 학생은 아니어서 작업물은 아쉬워 잔소리를 늘어놓으면 “교수님 좋아요” 하며 곰살궂게 굴던 아이였다.

“얼굴이 꽃처럼 폈네. 얼굴 좋다아~ 그래, 어디 취업했니?”
“저, 패키지 회사 들어갔어요! 일이 너~~~~무 재미있어요! 진짜 엄청 배우고 있어요.”

“아이고, 칼선이랑 별색 작업 많이 하겠네.”
“네! 맞아요. 그거 엄청 해요. ㅎㅎㅎㅎ”
“인쇄 사고 내지 말고~.”
“ㅎㅎㅎ 벌써 하나 냈어요… 그거 수정하느라 밤새우고, 오늘 일찍 끝난 덕분에 음료수 사 들고 학교 온 거예요.”

수업 때면 초보 디자이너가 하는 실수들을 입이 닳도록 말해주지만, 학생 땐 그저 한 귀로 흘리는 잔소리였을 거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말한다.

“교수님이 해주신 이야기들이 실무에서 정말 도움 많이 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기특하기도 하여라. 일이 너무 재밌다며 신나게 말하는 제자가 어여뻐서 퇴근하는 마음이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봄, 벚꽃, 수업 말고~

벚꽃이 만개한 금요일, 7시까지 내리 이어지는 연강 수업에 졸업반 아이들이 조른다.
“교수님, 이번 주 지나면 벚꽃 떨어진대요. 수업 말고 꽃구경 가요!~”

아이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답했다.

“좋지, 벚꽃. 예쁘지, 봄날.
그런데 나는 너희의 봄이 더 예쁘다.
올해 빡세게 준비해서 취업하고 내년에 만끽하렴.
그때 보면 더 예쁠 거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쉬운 탄식.

인생은 참 봄날 같다.
지나고 나면 이렇게 짧을 수가 없다.
나도 저 나이에 수업 끝나자마자 가방 싸 들고 뛰어나가던 날들이 있었는데…

김소연 시인은 『한 글자 사전』에서 봄을 ‘우리가 가장 잘 아는 기적’이라고 했다. 그렇다. 기적이다.
겨울을 지나 저렇게 이쁘게,
저토록 푸르게,
우라지게 이쁜 기적.
봄날은 온다. 그리고, 봄날은 간다.

오늘도 빡세게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 몰래 달력을 들여다본다.
어디 하루쯤 나도 땡땡이칠 수 있는 날이 없을까.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나도 잠깐은 철없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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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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