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미북, 드디어 그림 시작하기
썸네일을 완성하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차례다.
하지만 막상 흰 종이 앞에 앉으면 생각보다 훨씬 막막해진다.
계속 그림을 그려오던 일러스트레이터라면 이미 자신의 그림 스타일이 있고, 익숙한 재료와 방식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책 수업에 참여하는 분들 중에는 오랜만에 다시 그림을 잡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만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에서 많이 멈춘다.
그래서 수업에서는 그림책 작업을 빠르게 시작할 수 있도록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 스타일의 그림책을 하나 정하는 것이다.

어디를 보는지가 전쟁의 반이다
“어디를 보는지가 전쟁의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창작 전반에 그대로 적용된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내가 무엇을 보고 어느 방향으로 시작할지를 정하지 않으면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다 제풀에 지쳐 포기하기 쉽다.
그래서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그림책 코너에서 시간을 보내며 그림책을 천천히 살펴본다. 그리고 그중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그림 스타일의 책을 하나 고른다.
이때 중요한 주의점이 있다.
너무 멋지기만 한 그림책은 NO.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감탄만 나오겠지만, 이제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 가까워져야 한다.
“이건 정말 잘 그렸다”보다,
“이 정도라면 나도 한 번 그려볼 수 있겠다”
싶은, 조금은 만만한 책을 고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스타일을 정하면, 재료도 정해진다
그림 스타일을 정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용할 재료도 따라온다.
연필화로 작업한 작가의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면 연필로,
색연필 작업이 좋았다면 나도 색연필로,
반면 물감이나 디지털 작업은 생각보다 많은 연습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릴 수 있다면 어떤 재료든 상관없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지금의 내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잘 그리고 싶은 마음보다, 계속 그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쪽이 우선이다.
이 짧은 기간에 동영상으로 공부하시며 그림을 완성하신 분도 계셨는데, 집에서 ‘이렇게 공부 했으면 하버드갔겠어.’라고 했다며 수업에 와서 웃으셨다. ㅎㅎ
첫 페이지부터 그릴 필요는 없다
썸네일의 첫 페이지부터 순서대로 그려야 할 필요도 없다.
내가 그린 장면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
혹은 가장 그리고 싶은 페이지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그림책은 호흡이 긴 작업이다.
한 장의 그림이 자판기처럼 뚝딱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막상 시작해 보면, 단 한 장의 그림을 ‘내 마음에 들게’ 그리기까지가 가장 오래 걸리고, 가장 힘들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손에서 나온 결과물 사이의 간극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한 장을 완성하는 데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래서 추천하는 또 하나의 방법
이럴 때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캐릭터 시트를 만들고, 캐릭터 턴어라운드를 그려보는 것이다.
본격적인 페이지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을 그려보며
재료를 가볍게 다뤄본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아, 이 재료는 생각보다 써볼 만하구나.
혹은, 이 재료는 내가 컨트롤하기엔 아직 어렵겠네.
재료를 바꿔야겠구나.
재료를 시험해 보면서 동시에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으니, 그야말로 1석 2조다.

자, 이제 정말 시작이다
캐릭터 턴어라운드까지 마쳤다면,
이제는 정말로 한 페이지를 그려볼 차례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페이지가 책에 그대로 들어가지 않아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이제 더 이상 계획이 아니라 그리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자, 이제는 그려야 한다.
어떤 책이 완성될지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