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필, 그 매력에 빠지다
요즘은 수채화, 색연필, 아크릴 그리고 아이패드로도 그림을 많이 그린다.
수업에서 다양한 재료로 표현하는 작업들을 자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여러 재료를 다루게 되었고, 디지털 작업도 여전히 병행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재료는 무엇인가요?” 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연필이요!’ 라고 대답하게 된다. ^^
어릴 적 연필은 가장 처음 손에 쥐고 낙서를 했던 도구였고, 학창 시절 내내 글씨를 쓰는 데 쓰였던 평범한 존재였다.
그런 연필이 이렇게까지 나를 사로잡는 재료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안개 자욱한 나무숲을 연필로 그리기 시작했던 어느 날, 내 작업을 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에어펌프로 꽉 눌러 채운 듯한 밀도야.”
그 말이 너무 강렬해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료안지의 모래 정원을 떠올리게 하는 고요함이 꽉 찬 밀도였다고 해서, 나중에 ‘료안지’를 실제로 찾아가 몇 시간을 조용히 앉아있다 오기도 했다.
그 후로 안개숲과 나무 그림을 몇 년동안 연작으로 그려냈다.
연필로 그린 그림만 봐도 마음 한 켠이 뭉근해지고, 연필로 쓴 글씨에도 한번 더 눈이 간다. 흑백톤이 주는 이 묵직한 위로가 너무나 좋다.
마치 한쪽 다리가 빠진 의자에 앉았다가 빠진 다리쪽으로 훅- 몸이 기울어져 버리는 순간처럼, 내 마음도 기울어져 한참 보게 된다.


연필, 선긋기부터
그림을 막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선 긋기부터 알려준다.
수많은 재료 중에서도 연필, 특히 4B 연필로 반듯하게 선을 긋는 법을 연습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같은 힘으로 곧은 선을 긋는 법, 힘을 조절하며 선에 강약을 주는 법, 선들을 촘촘히 면으로 만드는 법…
그리고 그 면을 연하게 부터 점점 진하게 표현하면, 명암을 이해하게 된다.
그 훈련이 익숙해지면 연필만으로도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첫 수업날 연필의 종류부터 시작해, 연필 쥐는 법, 선 긋는 방법을 하나하나 설명한다.

연필의 세계: H와 B의 이야기
연필은 크게 H와 B로 나뉜다.
흔히 ‘흐림’과 ‘진함’으로 구분하지만, 사실은 연필심의 단단함에 따라 구분된다.
H(Hard) : 심이 단단할수록 숫자가 커진다. (예: 9H, 8H, … 2H, H)
연필심인 흑연의 주성분 비율에 따라 9H부터 8H, 7H, 6H…2H, H까지 있다.
숫자가 작아질수록 심이 부드러워져서 쓰기 편하고, 숫자가 클수록 선은 얇고 흐리며 심이 단단해서 글씨를 써보면 뻑뻑한 느낌이다. 처음 9H로 선을 그어보라 하면 “엥~ 선이 보이지도 않아요” 할 만큼 연하다.
높은 숫자의 H연필은 그릴때 농도차이가 별로 안나는 것 같지만 날카롭고 정교한 느낌이 들어서 세밀한 표현에 쓰기 좋다. 완성해 놓으면 정말 미묘하고 디테일한 차이를 만들어준다.
B(Black) : 심이 부드러워질수록 숫자가 커진다. (예: B, 2B, … 9B)
H와 반대로 B는 숫자가 클수록 진하고 심이 부드럽다. B는 Black의 약자인데 말그대로 진하기를 말한다. B또한 9B부터 B까지 있다.
보통 미술용 연필로 4B를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데, 진하기나 단단함이 두루 사용하기 좋기 때문이다. 필기용으로는 H, HB, B 2B 까지 많이 사용한다.
HB와 F : 중간 단계인 HB
전문가용 셋트를 사면 F라고 쓰여있는 연필도 있다. F는 FIRM의 약자로 견고함, 단단하다는 뜻으로 H와 B의 중간인 HB와 같다.

사각사각, 연필로 그려낸 마음의 풍경
“연필화를 그리려면 9H부터 9B까지 다 사야 하나요?”
연필로 선긋기 연습을 한 후에 톤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이렇게 물어보신다.
“절대 아니죠.
4B랑 H중에 몇자루 정도만 있어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 라고 답해드린다. ^^
9H부터 9B까지 구성을 갖춰 놓으면 뽀대는 나지만 처음엔 4B 한자루로 시작해도 충분하다. 🙂
그림의 재료는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재료로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연필은 선의 필압을 가장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도구로,
드로잉에서부터 소묘에 이르기까지 농밀한 회색 톤과 깊이를 그려낼 수 있다.
나는 안개숲과 나무를 그릴 때,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오래도록 바라본다.
스케치 없이 천천히 선을 쌓아가는 작업이기 때문에 한 장을 완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하지만 느리게,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들으며 종이 앞에 앉아 있는 그 시간은
마치 무중력 속에 떠 있는듯 고요하고 안온해진다.
나에게 연필은 단순한 선을 넘어서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도구다.
사각사각, 그 하나하나의 선들이 쌓이는 시간을 한없이- 사랑한다.
연필로 그린 나의 안개숲 작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