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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필, 손끝의 온도를 닮은 도구

건식 재료 수업

처음 만나는 드로잉의 세계

성인 수업이든 학생 수업이든, 그림의 시작은 언제나 선을 긋는 일에서 시작한다.
선이 모여 면이 되고 면을 만드는 선의 방향과 힘에 따라 톤이 된다. 흥미로운 건, 성인들도 아이들도 힘줘서 진하게 긋는 건 잘하지만 힘 빼는 걸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림이 마음처럼 완성되지 않으면 금세 “저는 재능이 없나봐요”라며 속상해한다. 그럴 때 나는 말없이 작은 도구 하나를 꺼낸다. 기본 재료를 살짝 ‘업그레이드’해주는 도구, 바로 찰필이다.

이 도구를 처음 꺼내들면 다들 표정이 늘 비슷하다.
“이게 뭐예요, 선생님? 연필이에요?”
조용히 웃으며 찰필을 집어 든다. 손끝에 닿는 질감이 종이 같기도 하고, 단단한 연필심 같기도 하다.

“이건 문지르는 도구야. 선과 면 사이를 이어주는, 그런 다리 같은 존재지.”

찰필, 너란 재료는

찰필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늘 재료부터 다시 설명한다.

그림의 재료는 크게 습식재료(wet)와 건식재료(dry)로 나뉜다.
수채화, 유화, 아크릴처럼 액체 성분을 포함해 흐르고 마르는 재료가 습식이라면, 연필이나 목탄처럼 마찰로 흔적을 남기는 재료는 건식이다.

“찰필은 건식 재료의 세계에 속해 있어요.
즉, 물기가 아니라 입자와 마찰로 표현을 만들어내는 세계죠.
그 입자들을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 그게 찰필을 쓰는 이유예요.”

찰필은 종이를 돌돌 말아 연필처럼 만든 도구다. 두께나 크기도 다양해서 작업에 맞게 골라 쓸 수 있다.

찰필 사용법
건식 재료 수업

찰필이 닿을 수 있는 재료들

나는 연필을 곱게 칠해 톤을 만들고 그 위에 찰필을 살짝 얹어 문질러 보인다.
“보이나요? 경계가 사라지죠. 선이 면으로 녹아요.”

찰필은 손가락보다 더 세심한 터치로, 입자 하나하나를 표면에 눕혀준다. 연필의 단단한 선도, 목탄의 거친 입자도 찰필 아래에서는 부드러운 명암으로 변한다.

“이건 단순히 ‘번지는 효과’가 아니라, 빛과 그림자 사이의 온도차를 조절하는 일이에요.”

하얀 종이 위에서 회색이 숨 쉬듯 번진다. 그 순간 학생들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찰필, 문지르기의 감각

찰필은 힘이 아니라 감각으로 사용하는 도구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너무 세게 누르지 말아요. 종이를 긁게 돼요. 그냥 피부에 바람이 스치는 정도의 힘이면 충분해요.”

연필로 음영을 깔고 찰필을 움직인다. 손끝이 조심스레 종이 위를 떠다닌다. 아이들도, 성인들도 감탄한다.
“와~ 이 재료, 맘에 들어요!”

연필이라는 익숙한 재료에 찰필이 얹히면, 그림은 훨씬 풍성하고 깊은 호흡을 가진다. 그림을 그리는 손끝을 보며 덧붙인다.
“찰필은 명암을 만드는 게 아니라, 명암이 자연스러워 질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예요. 스스로 그리지 않지만, 그림을 완성시키죠. 이때 문지르는 힘이 너무 쎄면 안돼요. 힘을 빼고 부드럽게 톤을 만드세요.”

문지름이 지나간 자리에는 면과 면이 이어지고, 선의 긴장이 풀린다. 찰필은 그렇게 사이를 만들어 준다. 빛과 그림자 사이, 재료와 종이 사이, 그리고 그리는 나와 그림 사이를.

찰필 관리와 작은 습관

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찰필 끝은 점점 검게 물들어간다.

“너무 더러워졌다고 버리지 마세요. 끝부분을 사포에 문질러 닦아내면 찰필을 계속 쓸 수 있어요.”

그리고 덧붙인다.
“한 번 쓰던 찰필은 같은 재료끼리만 써야 해요. 목탄을 쓰던 찰필로 연필을 문지르면, 검은 입자가 옮아가서 깨끗한 톤이 망가집니다.”

그 작은 관리의 습관이 그림의 완성도를 바꾼다.

건식재료로 그려가는 그림은 느리다. 꾸준하고 천천히 힘을 줬다가 힘을 뺐다가를 반복하며 그리는 선과 톤을 쌓아가는 작업이다. 천천히 그리는 대상을 바라보고 디테일을 발견하며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

“찰필로 문질러본 자리는, 그 사람의 손끝이 지나간 자리예요.
그 흔적이 곧 그림의 숨결이 되죠.”

찰필 하나로 배우는 것은 단지 그라데이션이 아니라 재료와 손 사이의 감각적 이해, 그리고 그림 속에 머무는 조용한 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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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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