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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다람쥐처럼 읽는다

애서가의 책장

애서가의 책장

나는 책을 다람쥐처럼 읽는다

나는 책이 좋다.

이사할 때마다 책들을 중고서점이나 지인들에게 듬뿍 주고도, 여전히 “이 아가씨 책이 많네”라는 이삿짐 센터 아저씨들의 말에 멋쩍어하며 ‘이번엔 책을 좀 줄이자’ 다짐하곤 하지만 어김없이 책장은 터질 듯 늘어나고, 결국 또 책장을 샀다.

2중으로 겹겹이 꽂혀 있던 책들이 새로 산 책장에 널찍하게 꽂히니 단정하다. 덩달아 내 마음도, 햇볕 좋은 날 널어 말린 빨래처럼 탁탁 털고 기분 좋게 접어놓은 것처럼 단정해졌다.

다들 이 정도는 책을 가지고 살지 않을까 싶다가도, 이사할 때마다 책들 때문에 짐 싸는 시간이 늘어나는 걸 보면 나는 좀 많은 편인가 보다.

한 번은 놀러 온 조카가 물었다.
“이모! 와~ 이 책들 다 읽은 거예요?”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모 책장엔 읽은 책이랑, 읽고 있는 책이랑, 앞으로 읽을 책이 같이 쌓여 있는 거야. 책이란 그런 거야~ ㅎㅎㅎ”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다독가는 아니다. 수업과 작업과 이런 저런 일들에 밀려 한줄의 문장을 읽지 못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이 길어지면 예민해진다. 그러니 나는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를 자칭한다. ^^

책을 읽다가 잘 안 읽힌다 싶으면 책갈피를 꽂아두고 다른 책을 집는다. 그러다 다시 전에 읽던 책을 펼쳐보기도 하고, 잠시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한참 뒤에 읽기도 한다. 침대 옆에 두어 권, 책상 위엔 서너 권, 책장에는 읽다 만 책이 여러 권이다.

동시에 여러 권을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속독을 익히게 됐다. 어떤 책은 문장을 곱씹으며 천천히 읽고, 어떤 책은 국수 먹듯 후루룩 페이지를 넘긴다.
그러다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저자가 궁금해져 이 저자의 다른 책들을 몽땅 장바구니에 담는다. 찜해두었던 신작, 궁금한 책들과 한꺼번에 주문한다. 그래서 읽는 책보다, 읽을 책이 더 많이 쌓여가고 있는 것이 지금 나의 책장이다.

애서가의 책상

한동안 신형철 작가와 리베카 솔닛, 작년에는 피터 비에리와 몇몇 작가를 지나, 요즘은 비비안 고딕의 책을 읽고 있다.

책장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각 책마다 내가 어떤 시기에 읽었는지, 그때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위로를 받았는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저 책을 읽고 울었었지. 지금 읽으면 안울것 같지만 그땐 저 책이 위로가 됐어.’
‘저 책은 너무 좋아서 밑줄을 그으며 읽다가, 아예 책 모서리를 몽땅 접어버렸지.’
‘아, 저 책은 다시 안 읽을 테니 저쪽에 두어야지.’ 등등
이런 생각들이 책장 앞에서 오간다.

한동안 신형철 작가의 책을 읽으며 ‘지금 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품고 지낸 적이 있다.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며 사나요? 무엇이 당신의 삶을 지탱하나요?” 질문을 하고 여러 대답을 들었지만 나는 쉽게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쏟아지는 햇살이 거실 창을 통과해,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 찬 책장과 그 앞에서 뒹굴며 햇살 목욕을 하고 있는 두 마리 고양이를 비췄다. 라디오에선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방금 내린 따뜻한 라떼를 마시며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고 있는 시간.

그 순간 마음이 따뜻함으로 가득 찼다.
아… 행복하구나.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 시간을, 이 공간을 사랑하는 거라고. 그러니 그만둘 수가 없다고.

다람쥐는 도토리를 여기 조금 저기 조금씩 넣어 두곤 잊어버린단다. 그래서 그 도토리들이 싹을 틔워 나무가 되고, 그 나무들이 숲을 이루는 중요한 한몫이 다람쥐라는 얘길 들었다.

나도 다람쥐처럼 책을 읽는다. 이 책 저 책, 조금씩. 책을 사랑하는 애서가의 마음속엔 언제 읽었는지 모를 문장들이 조금씩 쌓여 숲을 이루고 있다면 좋겠다.

애서가의 책장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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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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