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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리스본행 야간열차』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다시, 리스본행 야간열차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 사이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소설책들은 많이 정리되었고,
전에 지인에게 건넸던 책이라 다시 주문했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내가 추천한 작가이기도 했으니까.
예전에는 1, 2권으로 나뉘어 있던 책을 600페이지가 넘는 한 권의 ‘벽돌책’으로 묶여 있었다.
요즘 출판 시장에서는 분권보다 이렇게 한 권으로 묶는 것이 유행이란다.
벽돌책은 정말 무기같다. ㅠㅠ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초반 강렬한 장면에 저 여인이 궁금해서 끝까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책과 영화 사이, 상상이 사라지는 순간

오랜만에 다시 읽는 책은 낯설 만큼 새로웠다.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늘 아쉬움을 남겼기에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 중에서 만족스러웠던 건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 정도다. 대부분의 소설 원작 영화는 늘 아쉽다.

망설이다 결국 영화를 보았고, 예상대로 조금 후회했다.
영화의 이미지가 책 속 인물에 대한 나의 상상을 단번에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리스본의 풍경과 장면들이 생생하게 다가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동시에 상상의 여지를 잃었다. 이제는 책 속의 그레고리우스를 다른 모습으로 떠올리기 어렵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책을 읽다 중간에 영화를 보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는데, 영화와 책의 다른 결말, 디테일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이 방대한 이야기를 한 편의 영화에 담아내야 했을 감독의 어려움도 이해가 갔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탄 이유

스위스의 고전어 교사 그레고리우스는 비 오는 아침,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 충동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오른다.
리스본에서 그는 한 포르투갈 의사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타인의 삶을 추적하는 동시에,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존재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두 번째 독서, 속도를 늦추는 이유

처음 읽었을 때는 이야기의 전개가 궁금해 속도를 내며 읽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결말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독서는 달랐다. 훨씬 천천히 읽게 된다.
언어철학자이기도 한 작가답게, 문장 하나하나가 오래 머물게 만든다. 여전히 많은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으며 읽었다. 이야기를 따라가기보다, 문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사라진 페이지에 대한 아쉬움

독서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예전 2권짜리 책에는 실려 있었던 ‘작가와의 대담’이 이번 개정판에는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판 과정에서의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 작품을 둘러싼 작가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사라졌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우리 안의 ‘경험되지 않은 부분들’

“난 완벽하게 우연히 이곳에. 당신은 완벽하게 우연히 그곳에 있었소. 그 사이에는 샴페인 잔들….. 그래요. 그랬던 거요. 필연은 없었소.”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비에리는 소설 속에서 묻는다.
“우리 모두 삶의 일부분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라면, 우리 안에 있는 나머지들, 즉 경험하지 못한 대다수의 부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틈’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좋다.
자신의 모습들 중에도 틈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래서 타인 역시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틈을 함부로 메우려 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편해진다.
그 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 다른 삶, 다른 방향에 대한 여지. 그 상상을 더 넓혀주는 이런 책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동진행 밤 버스, 남해의 해돋이를 보겠다고 충동처럼 잡았던 운전대, 삶은 이런 우연들의 틈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희망해본다. 이번엔 또 어디로, 무엇을 해볼 수 있을지.

이 책 곳곳에는 다른 책들이 인용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들어왔던 것은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였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곧바로 『불안의 서』를 찾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세계가 또 다른 세계로 열리는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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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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