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각예술이라는 우산 아래
일러스트레이터와 그림책 작가로 구성된 시각예술인들의 작업실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공간, 첫날. 조용히 눈인사하고 “이것저것 합니다~” 하고 넘기려 했지만… 실패했어요.
어쩔 수 없이 저를 설명해야 했죠.

그런데요, 언젠가부터 저를 설명하는 게 참 어렵더라구요.
예술이라는 커다란 영역 안에서 ‘디자인’과 ‘그림’은 교집합이 있으면서도, 참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켜요.
디자인할 때의 저는 마치 공장처럼 돌아갑니다.
작업 내용을 분석하고 정리하고, 마감에 맞춰 시간을 최단으로 줄이기 위해 빠른 손, 광클릭 마우스, 일당백 디자이너 모드 발동.
그 모습의 저는 단단하고 효율적인 ‘이’ 같아요. 뽀드득 씹는 이.
반면, 그림을 그릴 때는 완전히 달라요.
헝클어진 안개 같은 감정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굴려보며, 한없이 느린 속도로 이미지의 결을 더듬어요.
그 감각을 음미하는 저의 모습은 부드러운 ‘혀’에 가깝죠.
그래서 이 두 작업의 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뼈속까지 이쪽 사람?
튼튼한 이로서의 저도, 부드러운 혀로서의 저도 모두 저인데,
이 둘의 텐션이 너무 달라서 결국 “이것저것 합니다ㅎㅎ” 하고 얼버무리곤 해요.
출판 편집 디자인부터 제품 기획, 굿즈 디자인, 일러스트, 디자인 강의, 파인아트까지…
이것도 저것도 하다 보니 자꾸 우물쭈물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다 얘기하고 나니 웃으며 말하셨어요.
“뼈속까지 이쪽 사람이군요!”
요즘 이런저런 생각들로 울렁거리고 있었는데, 그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되었어요.
그래요. 텐션은 달라도 결국 시각예술이라는 우산 아래,
이 밥 오래 먹은 사람 맞나 봅니다.
근데요… 정말 제 뼈속이 보이셨나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