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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같은 인연, J_3

시트콤같은 인연, 춘천

춘천, J를 만나고 돌아오다

춘천에서 돌아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J의 말들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다.

“나는 실패했어.”
“지금의 나는 마치 식물인간 같아.”

그 말은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더 깊이 박혔다.
나는 왜 갑자기 J에게 연락을 했던 걸까.
며칠 전, 읽고 있던 산문집이 떠올랐다.
요즘 천천히 읽고 있는 작가의 책.
문득 기억났다.
몇 해 전, 이 작가의 전작을 선물해준 사람이 바로 J였다는 걸.
책을 읽으며 무의식중에 J가 생각이 났나보다.

때로 사람은 한참 지나서야 이유를 깨닫는다.

시트콤같은 인연, 춘천

정동진, 마음이 열린 밤

우리는 두번째 만나서도 영화를 보지 못했다.
대신 바다를 보러 가겠다는 나의 말에, 막차를 타고 정동진에 가기로 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매표소 직원이 말,

“막차 티켓이 한 장만 남았어요.”
우리가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니
직원이 말을 덧붙였다.

“가끔 표를 사고도 안 오는 사람이 있어요. 버스 앞에서 기다려보세요.”

우리는 마지막 남은 티켓 한 장을 들고
버스 앞에 서서 기사님께 사정을 얘기했다.
막차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가는데,

“15분만 기다려 주시면 안돼요?” 하고
일행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기타 가방을 맨 키큰 남자에게 단호하게 고개를 흔드는 운전기사님.
우리를 보고 엄지를 들어 어깨 뒤쪽으로 척 올리며
“타세요~!” 하셨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보며, “어머머머…”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막차 버스를 타고 정동진에 도착했다!!!

시트콤같은 인연, 정동진

바닷가 앞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밤새 서로의 이야기를 꺼냈다.
이상한 밤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가장 내밀한 아픔들을 파도의 물거품처럼 쏟아냈다.
낯설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땐 그냥,
“이 사람, 좋은 사람이다.”
그 느낌 하나로 충분했다.

꼬박 밤을 새워 이야기 하고 밝아오는 새벽, 서울행 첫 버스를 타고는
우리는 차안에서 꾸벅꾸벅 헤드뱅잉을 하며 왔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우리는 정확히 다시 일주일 후에 만나 드.디.어. 영화를 봤다.
시트콤 같은 우연들이 겹쳐,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J를 떠올리면 정동진의 그 깜깜했던 밤과 끝없이 들려오던 파도소리가 늘 먼저 떠오른다.

시트콤같은 인연, 정동진

우리는 언제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게 되는걸까?
어떤 사람은 몇 번을 만나도 여전히 낯설고,
어떤 사람은 첫 인사만으로도 마음이 스르르 열린다.
그 기준이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마음을 허락하는 건 ‘이성’보다는 ‘감각’이라는 것.
J와 나는 그랬다.
서로가 ‘안전한 사람’이라는 걸 그냥 알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렀고, J는 춘천에서
어머니를 돌보며,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쓴다.
그는 지역에서 생각을 나눌 이가 없어 외롭다고 했다.
“달리기 크루중에 친구 만들면 되잖아.” 내가 말하자
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여기선 사람들에게 절대 곁을 주지 않아.”
그말에 놀라기도 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떤 시기엔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기도 하니까.
상처에 예민한 사람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었던 건,
그저 타이밍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연들이 겹쳐 만든 그 시트콤같은 사건들과
마음의 문이 열려 있던 순간에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왜 사람은 어떤 사람에겐 쉽게 마음을 내어주고
어떤 사람에겐 끝내 벽을 두는 걸까.
곁을 허락하는 데에는 분명한 법칙이 없지만
우리는 직감처럼 안다.
이 사람에게는 내 마음을 보여도 괜찮겠다는 걸.

시트콤같은 인연, 춘천

J, 너를 응원해

10년전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는
‘프란시스 하’라는 흑백영화였다.
꿈을 안고 뉴욕으로 온 주인공은
오디션마다 떨어지고,
하는 일마다 꼬이고 풀어지지 않는 하루하루에서
어떻게든 살아내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영화였다.

J를 만나고 올라와 수업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J와의 시간을 떠올리다 같이 본 첫 영화 주인공처럼
우리가 그동안 내내 서로를 응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고향으로 내려가
달리기를 하고, 글을 쓰고,
여전히 자기 삶의 언어를 붙들고 있는 J.

외롭지만 살아내는 사람.
느리지만 계속 가는 사람.

나는 오늘도 조용히, 그를 응원한다.  

J의 삶도, 글도, 마음도 계속 이어지기를.
조금 느려도 괜찮으니, 너도 나도
계속, 계속 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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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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