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트콤 같은 인연, 춘천 가는 길
춘천.
4년 만에 통화한 J는 춘천으로 내려갔다며 내가 인삿말로 던진 “한번 갈게요”란 말에 “언제 올래요?”로 받아쳐 약속을 잡았다.
운전대를 잡고 내비게이션을 찍은 뒤 시동을 건다. 춘천이라니. 슬며시 웃음이 났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아니, 가만… 왜 갑자기 J가 떠올라서 연락을 했던 거지?’
엑셀을 밟으며 생각에 잠긴다.
J는 내게 ‘시트콤 인연’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벗이다. J를 떠올리면 여지없이 완성되는 문장.
사는 게 종종 시트콤 같을 때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바닥을 나눈 사이다.
그러니까, 그때의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아래에 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다.
그해 늦은 봄.
내가 좋아할것 같다며 지인이 추천해준 영화 ‘경주’를 봐야겠다 마음 먹었다.
추천 받은 건 한참 전이었지만, 불현듯 그 영화가 떠올라 상영 정보를 찾았더니,
서울에서는 딱 한 곳, 정릉의 ‘아리랑 시네센터’에서 내일 마지막 상영이 잡혀 있었다.
나는 파주에서 정릉까지 가기 위해 상영 3시간 전에 출발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며 아리랑 고개라는 정류장에 내리니 건너편에 아리랑 글자의 간판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크게 돌아 도착한 ‘아리랑 극장’. ‘시간은 충분하군’ 생각하며 문을 당기니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으로 위치를 찍거나 네비게이션을 보는 것이 편했더라면 헤맬 일이 없었을텐데, 그때의 나는 스마트폰도 운전면허도 없는 지독한 방향치와 길치인 그림을 공부하는 늦깍이 학생이었다. 길치인 내게 길 헤매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으나…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의 당혹함과 함께 여기까지 몇시간 전에 출발한게 아까워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아리랑 시네센터가 여기가 아니냐고 물었다. 시네센터는 여기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오기가 생겼다. 여기까지 왔는데 30분쯤이야.
큰길을 따라 30분간 걸어 도착한 작은 극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두리번거리며 상영관 정보가 있는 전광판을 올려다 보았다.
모든 영화의 제목 옆에 있는 글씨. 매진!!!!


매진이라는 글자를 믿을 수 없어 울것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는 내게, 덥수룩한 장발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 혹시 ‘경주’ 보러 오셨어요?”
“네~~”
라고 대답하는 나는 이미 낯선 사람의 경계심이 다리의 힘처럼 풀린 상태였다.
J였다.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자신도 경주 영화를 보러왔는데, 상영관 기계 장비에 문제가 생겨 티켓팅을 막기 위해 ‘매진’으로 처리해놓았다는 것.
약 30분 뒤, 상영 가능 여부를 알려주겠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
고로 의자에 같이 앉아서 기다려보자는 것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3시간을 들여 도착했으니, 30분쯤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J는 왜 이 영화를 보러 왔는지 물어보더니, 감독 이야기며 이 영화가 맘에 든다면 이라며
줄줄이 사탕처럼 다른 영화들을 추천해줬다.
그림 공부에 열중하던 나에게, 영화 정보는 귀했다.
자연스럽게 블로그 주소를 물었고, 나는 그를 팔로우했다.
30여 분이 지나고 영화는 상영을 시작했다.
나는 표를 샀고, J는 이미 한 번 본 영화라 다시 보러 왔지만
늦어진 상영 시간 탓에 저녁 약속에 늦을것 같아
“다음에 같이 영화 보자”며 인사하고 갔다.
그렇게 나는 영화 <경주>를 봤다.
밤늦게 도착한 집에는 “영화, 어땠어요?”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뒤, 영화를 보기로 약속했다.
꽤 괜찮은 감독인 친구가 추천한 영화가 있다고해서.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그림을 그리는 나에게서 열심히 도망치고 있었다.
그림이 좋아 뒤늦게 시작한 그림을 날 꼬박 새어 그리면서 행복해했던 시기를 지나
백지의 종이가 무서웠다. 그림을 그리려 종이 앞에 앉으면 눈물이 먼저 났다. 연필을 잡을 수가 없었다.
종이 앞에 앉지 않기 위해 도망 다니던 중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날 나는 영화 약속 외에 나만의 일정을 하나 더 추가했다.
정동진에 가서 해돋이를 보고 오기.
홍대 상상마당에서 영화를 보기로 한 날,
나는 바닷가에 갈 채비를 한 가방을 메고 나갔다.
시간 맞춰 도착한 우리. 인사를 나누고 티켓을 사러 갔지만—
그날도 상영이 취소되었다.
기계 고장.
J는 당황스러워했다.
“내가 영화를 정말 많이 보러 다니는데, 이런 경우는 진짜 처음이에요.”
황당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를 보고 헤어진 후 혼자서
막차 버스를 타고 정동진을 가려는 나의 계획은 어쩌란 말인가—



우리는 어색함을 삼키며 먼저 밥부터 먹기로 했다.
나는 막차를 타기까지 시간을 소비해야 했으므로 흥쾌히 밥을 먹으러 갔다.
식사를 하며 영화, 삶,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꽤 대화가 잘 통했기에, ‘아, 이 사람 참 착하구나’ 싶었다.
그리고—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말을 꺼냈다.
“저, 사실 오늘 영화 보고 나서… 혼자 바닷가 가서 해돋이 보고 싶어서 바다에 가려고요. 혹시…… 같이 갈래요?”
그때 J의 표정은 어떠했던가.
J와 벗이 된 이 시트콤 같은 사건들을 다른 친구들에게 해주면 똑같이 이 대목에서 눈이 꺼진다.
“미쳤구나, 너.”
“어디에서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와?”
글쎄, 나도 모른다.
흰 종이 앞에 앉지 않으려 도망가고 싶은 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내가 안에서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 중이라
그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라면 그게 뭐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릴 적 정동진 바닷가에서 해돋이를 본 기억을 소환하며 매서운 바람을 맞고 떠오르는 해를 보면 내 안의 둘 중 하나는 그 바다에 버려두고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닷가에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이상한 사람을 앞에 두고 착한 사람닾게
J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같이 가요.”
그리고 우리는 동서울터미널로 향했다.
마지막 정동진행 버스.
분명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좌석은 10장 이상 남아 있었던 걸 확인했었는데—
유리창 건너 창구 직원이 말했다.
“표, 한 장밖에 안 남았어요.”
연달아 터지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우리에겐 ‘티켓 2장’이 어려운 걸까.
그러나 이날 우리의 시트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_ 2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