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uh logo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으며.

뉴욕이라는 거리를 오가며 고닉은 대문자 E의 할머니처럼 지나는 이들을 관찰하고, 물어보고, 궁금해한다.
그리고 혼자 된 밤에 그들을 소환해 글로 풀어낸다.
그녀의 에세이는 경쾌하지만 날카롭다. 들추지 않거나 모른척 하고 싶은 마음을 들킨 것 같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느슨하게 연결된 구슬들 사이에서

고닉이 말하는 도시의 우정은 단단한 매듭이 아니라 느슨하게 이어진 구슬에 가깝다.
서로 친구는 아니지만, 모두가 나의 목 아래 가볍고도 단단하게 걸려 있는 존재들.

우리는 늘 관계를 설명하려 들고, 이름 붙이려 애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나를 지탱해온 사람들은 그렇게 명확한 범주 안에 있지 않았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깊이 알지 못해도, 서로의 삶에 조용히 걸려 있는 존재들.
그 느슨함 덕분에 오히려 삶을 버틸 수 있었다.

도시는 고닉에게 잔인하고, 동시에 매혹적인 장소다.
갈등과 불확실성, 골치 아픈 인간관계까지도 삶의 일부로 끌어안는다.
그러나 그 모든 활기 뒤에는 뉴욕의 외로움이 있다.

누군가는 고닉을 외로움을 가장 끝까지 붙잡고 파헤쳐 쓰는 작가라고 설명했다.
읽으며 나는 외로움이 아니라 ‘상태’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혼자인 상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 한편이 계속 마르는 상태.
그 외로움은 부끄러움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더욱 날카롭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1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2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가장 단단한 느슨한 관계, 나 자신

고닉은 자신의 삶을 ‘짐 끄는 말’에 비유한다.
균형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묵묵히 걸을 수 있지만, 무언가 흐트러지는 순간 다시 그 무게를 배워야 하는 삶.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자주 관계라는 마구를 걸친 채, 괜찮은 척 앞으로 걸어왔는지 떠올렸다.

관계는 종종 약속을 한다. 친밀함을, 유대를, 이해를.
하지만 그 약속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결핍이다.
결핍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무기력은 침묵이 되며, 침묵은 공허함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공허함과 함께 오래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에서 관계는 점점 느슨해진다. 더 이상 구원의 역할을 맡지 않는다. 대신, 관계가 해결해주지 못하는 몫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책의 중반 이후, 고닉의 시선은 명확해진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내 삶을 지배하는 힘은 오직 나 자신의 생각을 꾸준히 다스리는 일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통찰이었다.

말로 하기는 쉽지만 해내려면 평생이 걸리는 일이었다.

나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고자 했다. 생각을 통제하고, 확장하고, 내게 도움이 되도록 만드는 법을. 그러나 실패했다.

다음 날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또 실패했다.

사흘 뒤 나는 다시 책상으로 기어갔고, 패배한 채 책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다음 날이 되자 내 머릿속의 안개가 걷혔다. 다루기 힘들게 느껴졌으나 실은 간단했던 글쓰기에 대한 문제 하나를 풀자 가슴에 얹혀 있던 돌 하나가 치워지는 것 같았다. 숨쉬기가 수월해졌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그러다 어느 날 안개가 걷히는 경험. 고닉은 자신을 구원한 것이 ‘일’이 아니라, 매일의 고통스러운 노력이었다고 말한다.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만 자신과 다시 연결될 수 있었다고.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느슨한 관계로 남는다는 선택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으며, 나는 여러 번 멈춰 서서 밑줄을 그었다.
밑줄은 언제나 내 삶이 문장에 걸려 넘어질 때 생긴다.

삶이 종종 연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막과 막 사이의 간극이 괴로워 불 꺼진 무대 위에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다.

“내게는 나 자신이라는 친구가 있었다”라는 문장은 오래 남는다. 관계가 부족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단절되어 있을 때 사람이 더 외로워진다는 사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느슨해지지만, 그 느슨함 덕분에 오히려 나 자신과는 단단히 연결된다.

나는 여전히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실패하고 또 실패를 반복하는 일상이지만,
느리고 단단하게 살아가고 싶다.

아마도 그 시작은 느슨한 관계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일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지은이 비비언 고닉
옮김이 서재인
펴낸곳 바다출판사
초판 1쇄 2022년 8월 5일

첫페이지로 이동
인스타로 이동

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Related Posts

킥복싱 금지령, 잠시 다른 세계로 잠수하다_6

킥복싱 금지령, 잠시 다른 세계로 잠수하다_6

강도가 올라간 체력 운동 점심때의 킥복싱 멤버들은 초심자가 없어서인지 관장님의 체력 훈련 강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했다. 그날의 체력 운동은 배틀 로프와 월볼. 길고 두껍고...

편안함의 습격

편안함의 습격

『편안함의 습격』을 읽고 읽다가 육성으로 웃음이 빵 터졌다!아니, 마이클 씨, 오지의 북극 순록 사냥 원정기를 이렇게 풀어내기 있습니까?!!나는 이 위트가 너무 맘에 들어 새벽 내내 책을 붙잡고 읽었다....

9년만에 다시, 순천만

9년만에 다시, 순천만

9년 만의 재회, 나를 찾아가는 길 멀다. 멀기도 참 멀다. 지도앱를 켜고 도착지를 입력하니 4시간 반이 찍힌다. 왜 나는 하필 이 먼 곳으로 다시 향하는 것일까? 삶의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지난 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