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서가의 책장
음악의 언어
: 흐르는 시간에서 음표를 건져 올리는 법
『음악의 언어』를 읽고 – 무언가를 배우며 산다는 것
새 시집이 나왔다고 연락이 온 시인 S는 작업실을 새로 얻었다 했다. 기억하는 얼굴보다 환해진 표정이 좋았다. 작은 공간이지만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찬 자신만의 천국이라며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있으면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다며 웃는 얼굴이 해맑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나에게도 여기 앉아 들어보라며 LP판을 틀어줬다.
그런 그가 추천해 준 책이었다. 음악 이야기와 음악을 가르치는 이의 글이 꽤 괜찮다라며.
그게 벌써 몇년 전인데 왜인지 요즘 그 책이 자꾸 생각나 다시 꺼내 읽었다.
예상대로, 밑줄 친 문장들과 접힌 모서리들이 가득했다.
나는 책을 읽다가 정말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연필로 밑줄을 긋는다. 아니, 처음엔 차마 줄을 긋지 못하고 조심스레 페이지 모서리를 접어둔다. “여기가 좋았어” 하고 수줍게. 그러다 좋아하는 문장들이 점점 많아지면, 결국 연필을 들게 된다.
“아아, 여기 이 문장은 정말 좋아. 정말 와닿아.”
한두 문장으로 부족할 땐 꺾쇠 표시를 해둔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좋아.” 라는 뜻으로.
처음 읽었을 때, 정말 무릎을 ‘탁!’ 치며 모서리를 접은 페이지가 있었다.
언젠가 B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던 적이 있다.
“그림에 부채가 있어?”
나는 늘 ‘작업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조급했었고, 수업 중에도, 여행 중에도, 언제나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나 자신을 다그쳤었다. 그런 나를 보고 B가
“왜 그렇게 그림에 빚을 진 사람처럼, 꼭 그려야만 한다고 느껴?” 말했다.
그때 이 말에 꽤 놀라서, 마치 백조의 물밑에서 버둥거리는 내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배로 갚는 채무자가 되겠다며 입을 삐죽거리면서 궁시렁거렸었다.
그런데 책 속에서 이 문장들을 만났을 때 정말이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 마음이야!”
작은 유레카처럼. ㅎㅎㅎ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내 마음을 음악으로 표한 할 수 있다니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하지만 아마추어든 전문가든, 음악을 시작하는 순간 백조와 같은 삶이 자신 앞에 놓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겉으론 고아해 보이지만, 물 밑에서는 쉬지 않고 발을 동동거리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놀아도 노는 게 아닌, 마음 한구석에 ‘연습해야 하는데…’라는 부채 의식을 평새 안고 사는 삶.
…대체 왜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 걸까, 자괴감이 몰려오기도 한다.
연습. 애증의 연습.
“놀아도 노는 게 아닌, 마음 한구석에 ‘연습해야 하는데…’라는 부채 의식을 평생 안고 사는 삶.”
이 글의 제목이 습관처럼 좌절, 연습 이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했다.
음악대신 그림으로 읽혀지는 나는 이어지는 글에 연필로 쫙쫙 밑줄을 그었다.
음악이나 그림 뿐이랴, 무언가를 잘하고 싶어서 계속 연습하는 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문장일거다.


음악을 배우는 시간은 좌절의 연속인데, 스스로에 대한 꾸준한 실망과 낙담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연습이기 때문이다. 실망하고 연습하고 약간 회복하고, 또 다시 실망하고 습관처럼 연습하고 조금 더 회복하는 시간을 무한히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미세하게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음 목표를 꿈꾸게 된다. 이렇게 좌절은 조금씩 익숙해져 삶의 일부가 된다. …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때쯤이면, 이미 한 단계 올라섰다는 뜻이다. 멋지게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까지는 아닐지언정, 실망해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는 단계. 습관적인 좌절과 사소한 성공의 경험들에 익숙해지면 연습은 달콤한 꿀을 넘어 그 중독성에 이끌려 자꾸만 찾게 되는 쌉싸름한 커피가 된다.
다시 읽으며 역시~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다시 읽어도 좋은 책이다.
첫번째 읽을때도 좋아서 밑줄 긋고 접었던 페이지가 많았지만,
두번째 읽으니 다른 문장들이 마음을 건드렸다.
그 사이에 나의 경험과 시간이 어떤 문장들과 닿았나보다.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무릎을 탁 치게 되거나,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덮을 때 아쉽다.
그래서 ‘다시 읽고 싶은 책’ 코너에 조용히 꽂아둔다.
나에게 좋은 책이란, 몇번을 읽어도 다른 질문을 하게되는 책이다.
문득 생각나 읽고 싶어지면 다시 꺼내고,
어떤 문장을 다시 찾고 싶을 때 또 꺼내 읽는다.
그러면 매번 다른 문장이 나를 만나준다.
이번에 만난 문장은 이런 문장이었다.
말 안 듣는 딸은 자라서 음악 선생이 되었다. 엄마가 예상한 대로 화려한 무대 연주자와는 별로 가깝지 않은, 그보다는 모든 사람이 음악을 배우는 세상을 꿈꾸며 골몰하는 음악 선생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틀린 것도 있다.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이 모두 세계적인 연주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그랬듯, 음악은 그저 일상에서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음악을 배운 지 40년이 되었다. 오래 배웠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느림보였던 학생은 선생이 되어서도 끝없이 배운다. 아마 죽는 순간에도 ‘이렇게 마지막 숨을 내뱉는 구나, 진정한 스모르찬도, 음악의 끝. 내 생은 이렇게 소멸하는 군’이라고 중얼거릴 것만 같은, 평생 배우는 삶.

시인 S는 오늘도 작업실에서
좋아하는 클래식 LP를 틀고 책을 읽으며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웃으며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오늘,
흐르는 시간에서 또 하나의 문장을 건져 올리며
오늘도 이렇게 배운다며
나의 책장- ‘다시 읽을 책’ 코너에 꽂아둔다.
음악의 언어
: 흐르는 시간에서 음표를 건져 올리는 법
지은이 송은혜
펴낸곳 시간의흐름
1판 1쇄 2021년 1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