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이 되고 나서는 단발 머리가 내 트레이드마크였다. 나름 변화를 주었다고 말하면 늘 조카는 비슷하다며 ‘이모다운 헤어스타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문득 지금의 내 머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깨를 훌쩍 넘긴 긴 머리라니. 내가 언제 이렇게 길러본 적이 있었지?

내 폰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사진을 다시 찾아 본다. 세 형제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머리를 길게 땋아 양쪽으로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있다. 꼭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다정한 친구 “다이애나” 머리다. 아마 유치원 때 일 것이다.
해상도 낮은 오래된 사진 속, 기억엔 없지만 남아있는 명백한 증거.
그 뒤로 내 머리는 꽤 오래 단순해졌다.


사파이어 왕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내 머리는 아빠가 직접 잘라주셨다. 아주 반듯한 일자 칼단발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두발 규정이 있어 머리 길이도 늘 단발. 결국 커트와 단발 사이를 오가며 학창 시절이 지나갔다.
대학생 땐 짧은 컷트에 엄마가 파마를 해준 뽀글머리였다가 단발을 오갔는데,
그때 별명이 ‘사파이어 왕자’였다. 나중에 만화 캐릭터를 찾아보니 꽤 정확한 별명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몇 번 머리를 길러보려고 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머리가 목에 닿으면 간지러워 알러지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결국 늘 다시 잘라버렸다.
그래서 긴 머리는 항상 남의 이야기 였다.
인생 최장의 머리 길이
킥복싱을 시작하고선 줄넘기를 하거나 펀치를 치고 찰때 머리를 질끈 묶어 다녔는데, 어느 순간 머리가 어깨를 훌쩍 넘어 있었다.
이렇게 길러본 적이 없었던지라 다시 자를까 고민하다가, 어쩌면 이렇게 길러보는 건 인생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파마도 했다. 그것도 제법 뽀글뽀글하게.
수업을 들으러 오신 성인 수강생 한 분이 뽀글머리의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어머 쌤. 그냥 쌩머리로 묶고 있을 때는 얌전한 맏며느리 같더니, 파마하니까 완전히 다르네. 섹시해졌네~ 무슨 바람이 불었어?”
그 말이 너무 웃겨 한참 웃었다.
B는 뭐라고 했던가? 컷트와 단발을 오가며 삼각김밥이 되었다가 푸들 강아지가 되었다가 하는 내 변천사를 알고 있는 B에게 눈 한 번 흘깃하곤 엄청 웃은 기억만 난다. 웃었으니 그걸로 됐다.
헤어스타일 하나 바뀌는 것으로 이렇게 웃을 수 있다니, 그것도 좋다.

이 나이에 하는 작은 반항
집에 갔더니 엄마 아빠가 내 머리를 보며 한마디씩 하셨다.
“단정하게 자르지.” “단발이 깔끔하잖아.”
“나이 들어 파마하면 안 돼.”
요즘 엄마는 문자로도 잔소리를 보내신다.
청소를 할 때마다 바닥에서 긴 머리카락을 발견하면 나도 깜짝 놀란다.
“내 머리가 이렇게 길었어?”
그래도 그냥 두기로 했다.
어쩌면 이건 이 나이에 하는 작은 반항인지도 모르겠다.
조카들은 긴 머리의 이모가 새롭다며 예쁘다고 해줬고, 겨울 동안 긴 머리를 풀고 다니며 꽤 따뜻했고, 여름이 오면 포니테일로 묶어볼까 생각 중이다.
물론 언제 또 변덕이 발동해서 싹둑 잘라버릴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날마다 내 인생 최장의 머리 길이를 갱신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