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스칼 메르시어, 『언어의 무게』
하나의 문장을 만나기 위해 한 권의 책이 내게 닿을 때가 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언어의 무게』가 내게는 그러했다. 63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었지만, 어느 한 페이지의 문장 앞에서 나는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삶이 등 뒤에서 진행된 것 같아서
이 책은 의사의 오진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가, 그것이 오류였음을 알게 되면서 삶의 대전환을 맞이하는 번역가 레이랜드의 이야기다. 평생 타인의 글을 옮기던 그가 뜻밖에 출판사를 운영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은 나의 직업적 관심과도 맞닿아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책 곳곳에는 저자 페터 비에리 특유의 질문들이 스며 있다.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는가.
존엄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삶은 어떻게 다시 삶다워지는가.
그중에서도 내 마음의 수도꼭지를 틀어버린 문장은 이것이었다.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변하는지 제대로 느끼지 못하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지.
… 삶이 마치 등 뒤에서 진행된 것 같아서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 스스로 묻게 돼. 특정한 일화를 더는 기억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어떤 시기 전체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어떤 삶을 통과해야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걸까.
‘삶이 마치 등 뒤에서 진행된 것 같아서 나는 그때 어디에 있었는지 스스로 묻게 된다’는 문장을 처음 읽었던 2년 전, 나는 책을 읽다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조용하고 더운 늦여름 새벽이었다. 그 문장이 나의 어느 시절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페터 비에리, 『삶의 격』
페터 비에리는 다른 저서 『삶의 격』에서 존엄한 삶을 세 가지 차원으로 설명한다.
-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가
- 내가 타인에게 어떤 대우를 받는가
-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결국 존엄은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는 타인을 향한 시선이 되고, 그 시선은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다.
『언어의 무게』 속 레이랜드 역시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본다. 자신을 삶의 방향으로 붙들어준 사람들, 그리고 때로는 자신 또한 누군가의 곁을 붙들어주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그는 인간다운 삶의 형태를 배워간다.

마음의 더듬이가 긴 사람
2년이 지난 뒤, 다시 이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갔다. 그날 이런 질문을 받았다.
“힘든 시절, 그 터널을 걸어 나올 수 있게 곁에 있어 준 사람이 있었나요?”
질문을 듣자마자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사람은 거창한 위로보다 사소한 배려들 덕분에 어떤 힘든 시절을 통과하기도 한다는 것을.
별것 아닌 농담으로 웃게 만들던 사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마음껏 말해도 된다며 대나무숲이 되어준 사람.
무심한 듯 건네는 안부로 하루를 버티게 하던 사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이들 덕분에 다시 삶 쪽으로 걸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삶은 거창한 깨달음으로만 회복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다정함, 사소한 한 끼 식사, 장난 같지만 마음이 담긴 배려들 속에서 사람은 조금씩 자기 삶으로 돌아온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무게』를 덮고 오래 남은 것은 언어 자체보다도 사람에 대한 감각이었다.
독서 모임을 끝내고서도 이 질문을 받고 답을 한 시간이 내게 연필 자국처럼 남겨졌다. 내게 참 빛나는 사람들이다. 아홉이 아홉 번이 넘어가도록, 내 삶의 시기가 몇 번을 순환하더라도 그들을 향한 고마움은 닳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