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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같은 인연, 춘천에서 J를 다시 만나다_2

춘천 북한강

춘천, J를 다시 만나다

J가 보내준 주소를 찍고 도착한 곳은, 호반의 도시답게 강 바로 앞에 놓인 아파트 단지였다.
춘천이 고향이라며 명절때 춘천가는기차를 타는 J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주차했어”
톡을 보내니 잠시 후, J가 내려왔다.

덥수룩한 헤어스타일, 마른 체형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휑하게 줄어든 머리숱과 늘어난 흰머리가 세월을 말하고 있었다.

로컬 맛집이라며 데려간 닭갈비 집에서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우린 한두 계절에 한 번쯤 만나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전시나 영화,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변해가는 삶을 조용히 들어주던 사이였다.

아주 가깝지도, 아주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안부를 챙기던, 서로에게 좋은 청자.

내가 파주-동교동-일산-양재로 이사하며
그림을 그리며 수업을 하는 동안,
J는 흑석동-망원동-정릉으로 이사하며
글을 쓰고 문화재단에서 기획자로 일했다.

비평적 에세이를 쓰는 J는 영화제의 운영진이거나,
독립영화 상영 뒤 감독의 인터뷰를 맡기도 했다.

그랬던 우리가 못 만난 사이,
나는 분당에서 미술학원 원장이 되었고
J는 고향인 춘천으로 내려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다니!
우리는 서로에 관해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J는 얼마전 지인이 왔을때도 여기로 이사오라고 수십차례 얘길했다며 춘천에 미술학원 분점을 내라며 앞으로 이 말만 30번은 더 할 거라해서 같이 웃었다.

춘천 북한강2
춘천 북한강 다리

J는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춘천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가끔은 이유가 복잡하지 않아서 슬프다.

병세가 점점 깊어지는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돌보며,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꾸리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이 조금은 아프고, 조용하고 단단해 보였다.
이곳에 와서 그는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호수를 따라 뛰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달리기가 나를 살린것 같아.”

그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이제 나이도 있으니 ‘운동은 무조건 해야 한다’며 단언했다. 더는 마음만으로는 안 된다고. 달리기를 강추했다.
우리는 나이를 얘기하며 눈이 침침해진다거나, 관절이 쑤신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우리도 웃으며 인정하게 된 걸까.

점심을 마치고, 이야기는 J의 집으로 이어졌다.
한 번도 J그의 집에 가본 적은 없었다.

“가진건 책밖에 없어.”
전에 이사할때 마다 책이 많아 고생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중고서점에 책 팔아서 이사비를 마련했다는 농담까지.

다른 사람의 책장을 들여다보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글을 쓰는 J의 책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읽고 쓰는 삶의 풍경

문을 열자마자, 책.
정말 책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사 온 지 2년이 지났다고 했지만 이삿짐 아저씨들이 넣을 공간이 없다고 해서
그대로 쌓아둔 상태라며 웃었다.

저 책들을 정리하는 것보다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며. ㅎㅎㅎ

거실에서 보이는 뷰는 정말 끝내줬다. 흐르는 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운무가 드리운 창밖은, 살아 있는 풍경화였다.

“멋지지? 여기로 이사 오면 매일 저런 뷰를 볼 수 있어.
춘천에 미술학원 내는 거 어때?”

J의 익살스런 제안에 손사래를 치며 또 웃었다.

작은 방을 여니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도 부족해 바닥까지 책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바닥 위에 포개진 책무더기. 문을 열고 들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책이 쌓인 (정리되지 않은)공간을 본 적이 없어서, 입이 절로 벌어졌다.

춘천 작가의 방
춘천 작가의 방
춘천 작가의 방2

책상 위에도, 현관 앞에도, 각 방 벽면에도 책장이 가득했고, 그 안에도 미처 꽂히지 못한 책들이 겹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독서가의 방이 아니라, 삶 자체가 ‘읽고 쓰기’로 이루어진 사람의 집이였다.
글을 쓰는 삶이란 이런 걸까.

우리의 생존신고는 더 내밀한 이야기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 J의 자책 섞인 고백이 불쑥 나왔다.

“나는 실패했어.
서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호기롭게 내려왔는데,
나는 점점 땅속으로 가라앉고 있어. 그나마 달리기가 나를 구원했어.
지금의 나는 마치 식물인간 같아.”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눌린 시간들이 느껴졌다.
그 고백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한 ‘실패’란 도대체 어떤 얼굴인 걸까.

_ 3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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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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