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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9분, 의식의 흐름

의식의 흐름

새벽 3시 9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물을 마신다.
두 번째로 물컵을 채워 마시며 고민한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잠이 들까?

투두둑, 빗소리.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새벽까지 내리쏟고 있다. 제법 많이 내린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있으니 큰 녀석이 발치로 와 앉는다. 따뜻하다.
빗소리 좋네. 잠시 빗소리를 듣고 있다가 깨닫는다.
아, 잠자긴 글렀네.

어쩔 수 없다.
읽던 책을 마저 읽을까 하다가 책장에서 다른 책을 꺼내 앉는다.
작은 녀석이 털 공을 물고 온다. 던져주니 신나게 뛰어가서 물고 와 다시 발 앞에 놓는다. 집사가 잠이 깬 탓에 이 녀석들도 덩달아 잠이 깬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 반이다.

긴 추석 연휴 동안 비가 많이 내리더니, 그제 저녁 공원에 가보니 벌써 나무들의 잎이 가을빛으로 물들거나 앙상해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벌써 제법 쌀쌀하다.
나무는 무성해지는 여름을 지나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겨울을 준비한다.
바람과 비 때문에 잎과 가지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나무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한 생존능력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땐 우선순위에 관한 가지치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하니, 이건 생존의 문제인 것 같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어느 가지를 먼저 떨어뜨릴까.

의식의 흐름

새벽 내내 잠들지 못하다가 아침에 잠드는 게 며칠째다.
무너진 루틴은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전으로 돌아가는 회복 탄력성은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그러니 루틴을 새로 만드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생각들이 병목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생각은 느리고, 제자리에서 종종거리는 생각들만 가득하다.
뚫릴 것 같지 않다. 이쯤 되면 다른 길을 찾을 법도 한데, 길치의 방향 감각은 여기서도 발현되는 건지 매번 길을 잃고 만다.

우연히 들어간 골목길 끝의 막힌 벽 앞에서 되돌아가야 하는데, 그 벽 앞에서 막막해하다가 증발해버리곤 한다. 그러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또 마주친다. 같은 벽을.

이렇게 길을 잃거나 증발한 생각들은 내가 무언가를 결정하거나 직감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 걸까.

팔이 가렵다. 가려운 곳을 긁으니 알러지가 올라와 땀띠처럼 울긋불긋하게 부풀어 오른다. 시계를 보니 5시 22분.

비는 오늘도 종일 내릴까? 머리가 아프다. 아까부터 두통이 계속이다. 아무래도 약을 먹어야겠다. 눈을 조금이라도 붙였다가 일어나 피부과에 다녀오자. 운전하다가 졸진 않겠지? 커피… 내가 커피 사드리겠다고 해도 결국 또 사주시겠지. 그러면 사달라고 하는 게 나은건가? 커피 한 잔 하자는 말이 왜 이리 어렵냐.

빈말은 참 어렵다. “안녕하세요”라는 빈말에 내가 왜 안녕하지 못한지를 설명하는 건 서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까’라는 책은 제목을 참 잘 지었다.

하품이 나온다. 이제 슬슬 눈이 감긴다. 구영탄의 눈이 되어 있을 테니,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생각은 다시 내일, 이 중 아마 90퍼센트는 증발해버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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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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