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 만의 재회, 나를 찾아가는 길
멀다. 멀기도 참 멀다. 지도앱를 켜고 도착지를 입력하니 4시간 반이 찍힌다. 왜 나는 하필 이 먼 곳으로 다시 향하는 것일까?
삶의 어느 순간, 멈춰 서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분기점이 있다. 운전을 꽤 늦게 시작했던 내가 면허를 딴 지 1년 만에 4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전을 처음 시도하며 ‘인생 첫 나 홀로 여행’을 떠났던 곳이 바로 순천만이었다. 그게 9년 전.
인간의 몸의 세포가 7~8년 주기로 재생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7~8년 주기로 몸의 체질도 바뀐다고 한다. 순천만 습지의 갈대가 바람에 바스락거리며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내 삶이 몇 번째 버전이 되었을까 자문하며 세어본 기억이 생생하다. 올해 운전면허 갱신 후 새로 발급받은 면허증을 보다가 문득 어딘가 휘리릭 다녀오고 싶어졌다. 떠오른 곳은 순천만.
가자, 순천만.

노을과 달이 빚어낸 황홀경 앞에서
스무 살 초반에 ‘엄마’라는 이름을 얻었던 삶, 다시 홀로 내 이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알아가던 삶, 이사를 하고 하던 일을 바꾸고 누군가의 이름을 세어보며 고독했던 수많은 밤. 그 모든 시간을 지나 다시 찾은 순천만에는 시간이 딱 맞게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오른쪽 하늘은 해와 붉어지는 노을빛으로 물들고, 왼쪽 하늘엔 하얀 달이 어둑해지는 밤의 커튼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사락사락 갈대들이 흔들리며 내는 속삭거림과 어딜 봐도 카메라를 들게 만드는 황홀한 풍경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이토록 넋을 놓게 만드는 너른 풍경을 앞에 두고, 문득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이라는 산』 속 한 문장이 떠올랐다.
“착지의 자세를 생각한다.”
이 황홀경에 마음이 몽실몽실해지다가도, 이제는 나도 슬슬 착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난 9년이 삶의 버전을 갈아치우는 시간이자 치열한 방황이었다면, 이제는 단단히 딛고 설 다음 궤도를 그려야 할텐데…

다음날 아침, 나는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어제저녁 늦어서 미처 오르지 못한 전망대로 향했다. 어제저녁의 짧은 노을과는 다른, 가을 햇살이 쨍하게 쏟아지는 풍경을 홀로 고즈넉하게 누렸다.

이쓰리(E3), 함께 꾸는 새로운 꿈
순천만을 다녀와서 며칠 뒤, K출판사를 다니던 선배들과 급 만남이 성사되었다. 여전히 현역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M선배, 일러스트레이터로 전업한 후 10여 년 만에 만난 E선배, 그림도 그리고 디자인도 하고 있는 나, 세 명이 모였다.
지인들의 근황을 나누던 중, 문득 우리도 셋이서 같이 책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장 이름을 뭐로 할까 고민하다가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자고 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셋 모두 성이 이(李)씨였다.
이씨 세 명. “이쓰리(Lee-Three). 어때?” 아하하하하하. 좋다. 이쓰리! 좋아좋아. 이쓰리.
바로 카톡에 E3 모임방을 만들었다. 혼자서는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일이 셋이 모여 ‘이쓰리’라는 이름을 얻으니, 뭐든 되겠지 하는 든든한 마음이 된다. “와, 신난다. 빨리 책 만들어보자!” 다음 모임 일정을 확인하자며 폰을 꺼낸다. 폰 글씨가 작아 안 보인다며 안경을 두고 왔다는 귀여운 두 선배의 ‘나이 들어감의 투정’을 좀 더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ㅎㅎㅎ
내 인생 몇 번째 버전이 시작되려는 걸까?
까짓것.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해 보지 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