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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끝나지 않은 일

사나운 애착,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끝나지 않은 일

1935년에 태어난 비비언 고닉은 페미니즘 운동가, 이론가, 문학비평가로 활동하다가
52세에 자전적 소설, ’사나운 애착‘을 계기로 뒤늦게 작가로서 본궤도에 오른다.
80세에 접어들어도 회고록 등을 펴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며 ’작가들의 작가’로 읽고 쓰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에 읽은 세 권, 『사나운 애착』,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끝나지 않은 일』을
읽으며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를 조금 알게 된 듯하다. 여성으로서의 글쓰기를 맛본 느낌. ^^

비비언 고닉은 언제나 자신을 관찰의 도구로 삼는다. 감정에 잠기되 도취되지 않고, 경험을 고백하되 감상으로 빠지지 않는다. 고닉의 문장은 늘 질문형으로 남아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 감정은 어디서 왔는가, 이 관계는 무엇을 드러내는가.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 그것이 비비언 고닉이라는 작가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문장일 것이다.

비비억 고닉 사나운 애착

사나운 애착 ― 관계라는 감옥, 그리고 이해의 시작

『사나운 애착』은 모녀 관계에 관한 회고록이지만, 실은 관계가 인간을 어떻게 형성하는가에 대한 치밀한 기록이다.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은 정리되거나 봉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쌓일수록 더 끈끈해지고, 더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고닉은 그 관계를 “좁아터진, 강력하고 끈끈한 관계망”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밀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오래 붙들고 있었던 문장은,
엄마가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는 고백이다.
여자로 산다는 공허함, 수동과 반항 사이를 오가는 분열된 감정,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살았던 한 인간. 고닉은 엄마를 이해하려 애쓰는 딸이면서 동시에, 한 개인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지점은, 고닉이 끝내 화해를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그는 거리를 확보한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이 문장은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윤리처럼 느껴졌다. 이해는 가능하지만 동일시는 거부하는 태도.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짝 없는 여자와 도시 ― 관계 이후의 사유, 고독의 품격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뭐랄까.. 짧은 단상들을 엮어 놓아서 고닉의 에세이 뒷편의 생각 뭉치들을 엿본것 같다. 그녀의 생활들과 그 작은 사건들 속에 고닉의 고민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영토를 횡단하다 국경이 맞닿는 곳에서 이따금 만나는 고독한 두 여행자”라는 문장은, 관계를 바라보는 고닉의 시선을 정확히 보여준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보다, 각자가 어떤 삶을 통과해왔는지가 더 중요해진 시점의 언어다.

특히 마음에 오래 남았던 건 ‘자기 최선의 자아’에 대한 통찰이다.
우정이란 서로의 선량함을 확인하는 관계라는 오래된 정의는, 고닉 앞에서 해체된다. 오늘날 우리를 가까이 묶는 것은 오히려 감정적 무능, 공포와 분노, 치욕을 솔직히 드러내는 일이라는 말. 결점을 털어놓는 것이 곧 진실이라는 착각에 대한 경고까지 포함해서, 작은 감정을 이토록 곱씹고 글로 풀어내기까지.

이 책에서 고닉은 도시를 걷고, 대화하고, 생각한다. 일상에 추상적 사고가 맞물릴 때 생겨나는 그 짜릿한 순간들. 이 책은 고독이 사유로 어떻게 전환되는지 보여준다.

비비언 고닉 긑나지 않은 일

끝나지 않은 일 ― 다시 읽는다는 것, 의식이 자라는 방식

『끝나지 않은 일』은 만성 재독서가의 노트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다시 읽는다는 행위를 하나의 생의 태도로 끌어올린다.

“위대한 문학은 통합된 실존이 아니라, 그 위업을 향해 발버둥 치는 인간의 기록이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그가 보여준 수많은 흔들림과 오독, 감정의 편향들조차 하나의 성장 서사였다는 걸 뒤늦게 이해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개념은 ‘수용성, 준비된 상태’라는 상태에 대한 묘사였다.
책과 독자의 만남도,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결국 감정적 준비에 달려 있다는 통찰. 몇 년 전의 내가 무심히 지나쳤던 문장이, 지금의 나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를 이 책은 정확히 짚어낸다.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은 일

이 책을 읽은 이후로, 이상하게도 나는 계속 재독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읽고 밑줄을 그어두었던 문장들 위에, 지금의 내가 다시 선다. 그때는 거기까지밖에 읽지 못했구나, 하고 인정하게 된다. 동시에 지금의 나는 분명 더 넓은 원 위에 서 있다는 것도 느낀다. 의식이 동심원처럼, 겹치며 커져왔다는 감각.

고닉의 말들이 유난히 또렷하게 이해되고 공감되는 건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내 책장에는 ‘다시 읽고 싶은 책’ 칸이 따로 있다. 읽고 싶은 책은 많고 시간은 늘 부족하지만 좋은 책들을 다시 읽어보리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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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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