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rry Birthday
생일이 크리스마스 가까이에 있는 탓에, 어릴 적엔 늘 생일선물과 크리스마스 선물, 새해 선물을 퉁쳐서 받았다.
1타 3피였던 생일선물은 어린 나에게 꽤 큰 불만사항이었다. 내 생일이 내가 태어나 축하받는 날임에도 다른 기념일들 사이에 끼어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크리스마스와 생일, 연말과 연초를 함께 건너는 약속들이 자연스러워졌다. 생일을 핑계 삼아 안부를 묻고, 한 해를 정리하며 다음 해로 건너가는 시간들. 그렇게 나는 이 생일 주간을 ‘메리 벌쓰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듀, 2025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처럼 2025년이 지나갔다.
무언가를 많이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되돌아 생각하면 마음에 포근한 감각이 남아 있다.
분명히 무사히, 그리고 조용히 지나온 한 해였다.
스무 살 초반, 감정적인 싱크홀을 경험한 적이 있다.
발밑의 땅이 닿지 않는 느낌. 귀가 먹먹해지는 속도로 수직 낙하하고 있는데도, 어디까지 떨어질지 가늠할 수 없는 상태.
그때의 나는 그 시간을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다.
서른이 넘도록 감감해져 있던 시절들을, 마흔 살이 넘어서야 되짚어볼 수 있었다.
생각을 할수록 목 아래가 절여왔다.
한참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그것이 ‘감정적 싱크홀’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메리 벌쓰데이 주간에 유독 머리속에 맴도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
다시 책을 꺼내 밑줄친 문장들을 읽으며, 처음 이 책을 만났을 때의 내가 어떤 문장들을 만났는지 구슬처럼 꿰어보니, 내가 어떤 감정들로 이 책을 읽었는지, 문장들이 내게 와 닿는 순간마다 따뜻해서,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의 따뜻한 문장의 구슬들
사이먼 메이를 따라 사랑을 “무너뜨릴 수 없는 삶의 기반에 대한 희망을 우리 안에 일깨우는 사람과 사물들에게 느끼는 황홀”이라고 규정해보면 어떨까. “무너뜨릴 수 없는, 삶의 기반”이 주어져 있을 때 내 삶은 (삶의 위험으로부터의) 안정감과 (삶의 의미에 대한) 충만감을 얻는다. 비유적으로는 “고향에 와 있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고, 개념적으로는 “존재론적 정착”이라고 해도 좋다. …
이런 개념을 제안한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사랑에 대한 보다 자신감 넘치는 규정을 시도한다. “나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오로지 우리 안에 존재론적 정착의 약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척 드문) 사람이나 사물이나 개념이나 교리나 풍경들로 제한될 거라고 생각한다.” …
그런데 그런 터전이 외부에 꼭 있어야 하는가? 그래야 한다. “개인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느끼는 강렬한 취약함이라는 감각”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것은 낯설고 위협적이며 통제 불가능한 세계에 내던져진다는 것인데, 유년기 인간의 의식은 “상처받기 쉬움”이라는 속성을 갖는다.
그 의식에 제공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날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다. 취약함이 정착감을 갈구하고, 정착감이 취약함을 해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랑을, 더 정확히는 사랑의 필요성을 배운다.
이 문장을 읽던 날,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존재가 어딘가에 정착해 있다는 감각—안정감과 충만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이런 문장도 만났다.
결말에 이르러 “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진술한 다음 이렇게 덧붙인다. “‘조금’이라고 했지만 인간의 변화는 그 ‘조금’이 사실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 거듭남은 언제 강렬하고 또 다채로워질 수 있는가. 거듭남은 ‘내가 아닌’ 혹은 ‘나와 다른’ 것과의 만남을 통해 겨우 일어나는, 그야말로 사건이다.”
나는 여전히 ‘조금’씩 변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아마 그 정도가, 인간에게 허락된 변화의 속도일지도 모른다.
‘명제적 지식’이란 “사실에 대한 지식”으로 문학이 포함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고유하게 추구할 만한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비명제적 지식’은 어떨까. 이는 “어떤 상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으로서, 경험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지식의 형태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어떤 상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그것들은 설명으로 전달되지 않고, 살아보는 동안에만 알게 되는 것들이다.
삶의 비명제적 깊이를 가까스로 명제화해본다면 이렇게 될까? 무언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실은 그 기다림의 힘으로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그 기다림은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섣부른 절망과 희망의 언사는 당사자의 그 기다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문장을 읽고서 나는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붙잡고 삶을 버티고 있을까. 내가 엄마를 완전히 수용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그렇게 살아가기 위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시선은 다시 내 안으로 돌아와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붙잡고 이 삶을 버티고 있는 것일까.

2025년에도 고마웠어요
돌봄이란 무엇인가. 몸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가 걷게 될 길의 돌들을 골라내는 일이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그를 아프게 할 어떤 말과 행동을 걸러내는 일이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당신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번 더 사는 일.
연말이 되자, 생일 축하와 송년 모임, 신년 인사를 겸한 약속들이 이어졌다.
먼 이곳까지 시간을 쪼개 와준 친구와, 함께 주말을 보내고 가 준 동생과 아들. 특별한 이벤트도, 대단한 말도 없었지만 같이 보낸 시간만으로 충분한 생일선물이었다.
내 존재가 고맙다고 말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깨달았다.
내 발이 더 깊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는 그물망 위에 닿아 있다는 것을.
신형철 작가의 글처럼, 이 작은 마음들이 내 삶에 안정감과 충만감을 준다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이 작은 온기들로 삶을 버티고 있는 거라고. 함께 해준 시간들이 고마웠다고.
언제나 나보다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인 당신이 있어,
2025년에도 덕분에 행복했다고.
이렇게 또 한 살 나이를 먹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