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드를 올리고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
생각처럼 쉽지 않네.
좁은 길을 지나 골짜기를 넘어
커다란 바위를 만났어.

글은 산을 오른다는데 그림은 치고박는 링 위에서의 권투 시합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바위같은 어퍼컷에 고개가 들린다.
강력한 펀치다.
가드는 내려가 있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는 어퍼는 정확한 타격점인 턱을 향해 인정사정 없이 날렸다.

바위를 지나니 웅덩이
웅덩이를 넘으니 가파른 언덕
내가 날리는 펀치는 상대방은 다 보인다는 듯 요리조리 살살 피하고,
저 놈은 내 빈틈을 정확하게 꿰뚫고 펀치가 날라온다.
대단한 놈이다.
어느새 나는 주인공에 감정이입되어 치고 맞는게 내가 되어 있다.
다른 길로 갈까?
그만 내려갈까?
링 위에서 쓰러져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 애써본다.
헐떡거리는 숨 소리가 들릴것 같다.
이쯤되면 그만해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니다. 아직은 네 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어.
3분의 링위에 올라기기 위해 수 많은 시간을 땀 흘렸겠지.
그러니 조금만 더 해보라고, 힘내라고 응원하게 된다.

조금만 더 가자.
바람이 불 때까지.
그렇지. 그렇지.
네 실력을 다 보여주고 와.
힘 내~
일어났네. 다시 자세를 잡는다.

무자비한 놈.
빈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해 온다.
나는 내리 맞는 연타에 또 다시 무너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뭘 하는 거지?




길을 잃었나 봐.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 일어나라고~!!!
젠장.

산 위에는 정말 바람이 불까?
바람이 분다.
가드를 올린다.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서

얼굴이 엉망진창이다.
땀투성이에 여기저기 멍 자국까지…
신나게 쥐어 터져서 정신까지 나간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렇게 얻어터졌는데도 다시 일어나 웃을 수 있는 건가!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가드를 올린다.
비록 이번 링에선 졌을지라도, 승자다.
베시시 웃는 웃음에 나도 따라 피식 거린다.
가슴이 저리면서도 벅차다.
산다는게 이런거 아니겠는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 책 말이다.
킥복싱을 하고 오가며 걷다가 ‘아! 복싱을 하는 그림책이 있었어!’ 책장을 한참 뒤져서 찾았다.
복싱이라는 소재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 다시 읽는 책은 새로운 책이었다.
짧은 글 한 줄과 단순한 라인 드로잉 그림 뒤로 새롭게 읽히는 은유.
얼마전 ‘무쇠소녀단 2’의 마지막 편을 보다가 울어버렸다. 킥복싱 몇개월차인 내가 봐도 엉성한 냥냥펀치의 그녀들이 4개월만에 링에 올라서는 순간에는 내 심장도 벌렁거렸다.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응원하고 있더라.
다시 또 일어서는 마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해낸 순간, 그녀들의 눈물에 나도 같이 울고 있었다.
찰스 부코스키의 쿨한 표현을 빌리자면,
고맙다, 버텨줘서.
당신도 나도 그대도
침대 밑 슬리퍼 두 짝의 슬픔과 영광을
피와 함께 춤추는 심장의 발레를
사랑꾼 아가씨가 거울을 피하게 될 날을
지옥에서 하는 야근을
상한 샐러드로 때우는 점심을당신도 나도 그대도
깨닫지끝이 났다는 걸
혹독한 고통 후 또다시 혹독한 함정에 빠진 듯해도당신도 나도 그대도
깨닫지가끔 난데없이 나타나 매처럼 솟구치고 달처럼 불가능을
꿰뚫는 기쁨을당신도 나도 그대도
깨닫지성난 눈의 의기양양한 광기를
우리가 결국은 속지 않았음을우리 손을 우리 발을 우리 삶을 우리 길을 바라볼 때
당신도 나도 그대도
깨닫지_『망할 놈의 예술을 한답시고』 찰스 부코스키 / ‘당신도 나도 그대도’ 시의 일부
가드를 올리고
고정순 그림책
펴낸곳 만만한책방
초판 1쇄 2017년 11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