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계의 이름
“아…, 맥이 없어요.”
“네?”
어이가 없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손목에 맥을 짚고 있는 한의사 선생님의 첫 말씀이었다. 왼쪽 손목과 오른쪽 손목을 다 짚어보시고도 안 잡힌다고 하셨다. 맥 짚어보고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는 말 들으면 전화하라는 B의 말이 자동으로 머릿속에서 재생되어 당황스러웠다.
“맥이 정말 잡히지 않을 정도예요. ‘기진맥진’이라는 말 있죠? 그 말 그대로, 기가 다하고 맥이 다한 상태라는 거죠.”
8월이 넘어가면서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 먹는 것도, 일하는 것도 조심한다고 하면서 나를 챙겼는데도 저녁이면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저녁뿐만이 아니고 오전에도, 낮에도 졸음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병든 닭 꼴이었다. 예전에는 30분이면 쉬고 일어나 일을 하던 나였는데, 지금은 누웠다 일어나면 4시간이 지나 있었다. 아예 일어나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잠깐만 누워 있겠다고 누웠다가 다음 날 아침이 되어 힘들게 출근하는 일상이 너무 장기간 지속되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아프면 좋아하는 그림도 못 그리니 체력 관리를 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학생들에게 하면서, 정작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내가 싫었다.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는 게 속상했다.
이런 나를 B는, 어쩜 저렇게 호기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냐며,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는 농담 같은 비웃음으로 걱정과 잔소리를 했다. 한약이라도 지어 먹어야겠다고 하자, 바로 약 잘 지어준다는 한의원을 알려주셨다.
설마 그런 말을 듣겠냐며 웃었는데, 말 그대로 지금 내 상태는 면역력과 체력, 기와 맥이 전부 없는 상태란다. 자동차로 치면 오링 상태. 건강과 생활 습관에 관련된 여러 질문과 답이 오고 갔고, 원기 회복에 좋은 약재로 신경 써서 지어주시겠다고 하셨다. 지금은 너무 바닥 상태이니 운동도 안 좋다면서, 기름이 좀 채워진 후에 다시 천천히 달려야 한다고.
상담 후에 약 받을 주소를 확인하고 결제하려 하니, 이미 결제는 되었다는 말씀. 하이고야… B의 배려와 섬세함에 두 손을 든다. 난감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한의사 선생님이 “약 받으시면 잘 드시는 게 갚으시는 거예요.” 하신다.



이 숲 같은 사람은 종종 나를 많이 오해한다.
내가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쉽게 상처받는다고,
학교 업무에 필요 이상으로 정성을 쏟는다고,
1만 해도 되는 일을 3 이상 하는 사람이라고,
쉬고 노는 것을 못 한다고,
쓸데없이 너무 많이 생각한다고,
너무 많은 것을 완벽하게 하려 한다고,
그림을 그리는 내가 즐겁기보다 괴로워 보인다고.
물론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자주 특이하거나 괴팍하거나 까칠한 사람이 되므로,
생각보다 쉽게 상처받지 않고,
기대가 없는 일에 필요 이상으로 마음에 품고 애쓰지 않는다.
생각보다 냉정하고,
끊어낼 때는 단박에 선을 긋는다.
어이가 없을 때도, 애매하게 넘어갈 때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웃음에 내 마음을 그 뒤로 숨기는 것도 잘 한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살아가는 일과 같아서, 너무 바빠서 혹은 몸이 아파서 읽지도 그리지도 못하고 있으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면서도 꾸역꾸역 종이 앞에 앉는 것이다.
이러고 있는 것이 사는 것이라서. 그러나 내가 보이지 않는 많은 면을 저 숲 같은 사람은 알아챈다. 귀신 같다. 자꾸 나를 분석하고 경우의 수를 파악하며, 때로는 오버되게 잔소리를 하면서도 또 곧잘 미안하다고 한다.
웃음을 빵 터지게 하는 갈등을 풀어내는 위트,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자신감 넘치는 B가 참 좋다. 이 귀신 같은 사람에게 받는 게 많아서 이를 간다. 갚을 때까지 아프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싫어서, 말로 나오는 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 나는 말이 싫다. 사람은 편집에 능한 동물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기억을 재구성하고 말을 푼다.
나 또한 내 시간들의 상처를 너덜너덜하게 나 편한 대로 꿰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해를 풀 이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없으므로 신경을 안 쓰고, 가까운 이들에게는 힘들다 얘기하는 게 징징거리는 것 같아서 말을 삼킨다.
말을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소통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날 읽는 사람 앞에선 어쩔 줄 모르겠다. 때론 오해와 이해의 교차로에서 교통체증에 빠지기도 하지만,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며 웃는 나를 보며 우는 나를 알고 있는 벗들이다.
내가 가진 관계의 바운더리가 예민해서, 그리고 기본적으로 인간을 쉽게 신뢰하지 않아서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 더 깊게 교류하는 관계를 무척 힘들어한다. 이렇게 마음을 받을 때면 어찌해야 할 줄 몰라서 쩔쩔매는 것이다. 이런 챙김을 받을 때면 이 빚을 어떻게 갚나 싶고, 어떻게 나를 알아채나 미안하고, 이 마음이 고맙고, 내가 가지는 질문은 늘어나고, 괜한 걱정을 끼치기 싫어 더욱 바짝 기대지 않으려 몸을 세운다.
나는 타인에게 쉽게 내 속내를 털어놓거나 의지하거나,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쉽게 애착을 형성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신뢰는 정말 귀하다.
내가 쉽게 울보가 되는 이유다.

한의원을 나와 커피를 한 잔하고 나오니 밖이 선선하다.
올해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고 싶은 게 생겼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추석을 며칠 앞둔 달은 밝고 둥글어지느라 열심이다.
보름달을 향해 가는 달을 바라보며, 이름 붙일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한다.
선선해진 밤길을 오래도록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