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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하는 삶

관조하는 삶

관조라는 단어와 나

관조의 국어 사전을 찾아보니,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이렇게 관조적인 태도의 글이라 내가 궁금했다”고 말해 준 적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시인 S도 내게 무언가 변했다며 “관조가 생겼구나!” 하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의 무엇에서 그런 기운이 읽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관조하는 삶』 그리고 『피로사회』

이 대목을 읽으며 자연스레 『피로사회』가 떠올랐다.
책을 다시 펼치니 첫 문장,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에 밑줄이 그어있다. 이 얇고 작은 책은 읽으며 격하게 공감하고 내 안으로만 향해있던 시선을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과다한 노동과 성과사회”라는 시대적 자아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강력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었다고 하는 이와 만나면 마음의 유대감이 빠르게 커지곤해서, 종종 지인들에게 추천하는 책이기에 이번에 나온 책도 망설임없이 읽기 시작했다.

관조하는 삶

행위와 관조 사이에서

책은 내내 우리가 이 바쁘고 빠른 속도의 현재를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무위의 힘에 대해 말한다.
책 곳곳에 밑줄과 모서리를 접는다.

관조하는 삶

바라보기 위해 태어났다

던져진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으로, 왜 태어났냐는 질문에 이토록 아름다운 답을 읽어본 적이 없다.

“바라보기”위해 태어났다는 문장이 너무 좋아서 문장을 눈으로 몇번이나 쓰다듬는다. 어떻게 살면 저런 언어를 말할 수 있는 걸까?
언젠가 다음에 시간이 아주 많은 날,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눈으로 그림을 그리듯 천천히 선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싶다고.

한나 아렌트의 책 <행위하는 삶> 속의 ‘행위’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듯 짚어보는 후반부 글은 아렌트의 글을 읽지 않아서인지 좀 어려웠다. 그러나 아렌트가 놓친 관조의 힘에 대해 ‘행위하는 삶’과 ‘관조하는 삶’ 사이를 오가며 살아야 한다는 마무리. 정-반-합으로 귀결되는 결론이, 역시 철학가답다.

내가 꿈꾸는, 관조하는 삶

얼마 전 B와 통화하며, “저 좀 더 조용히 살고 싶어요.”라고 말했더니, 그는 지금도 충분히 조용히 살고 있다며 웃었다. 출퇴근 길도, 학원에서의 수업도 시끄러울게 없다고. 그의 말을 듣고 나니, 정작 내가 ‘조용한 삶’이 무엇인지 깊게 짚어보지 않은 채 튀어나온 말이었음을 깨달아 괜히 입을 오리처럼 쭉 내밀고 말았다.

그날 이후 생각이 남아, 비가 올 듯 흐린 날 물의 정원을 찾았다. 천천히, 사람 붐비지 않는 길을 걸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조용히 산다’는 건 어떤 하루일까? 이런 자연을 눈만 뜨면 볼 수 있는 환경일까? 내가 바라는 ‘조용한 삶’의 환상은 무엇일까?”
내 안에서 질문의 답을 찾으며 문장으로 완성되려면 더 많은 무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행위와 관조를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돌면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되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관조하는 삶

책은 올초에 샀는데 완독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읽다가 다른 책으로 넘어가 한참 손에서 놓았다가 이제야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는데, 과연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 스스로 반문이 생겨 다시 읽어야 할 책칸에 꽂아두고 다시 읽어보자 다짐한다.


관조하는 삶

지은이 한병철
옮긴이 전대호
펴낸곳 김영사
초판 1쇄 2024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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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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