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둘째다.
위로 세 살 터울 오빠가 있고, 아래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 있는 1남 2녀 중 샌드위치 장녀. 사회생활을 하며 둘째라고 밝히면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아, 역시. 둘째들이 자립심이 강하더라고요. 중간에 치여 자라 그런가.” 둘째들은 정말 다 그럴까? 모두가 비슷한 성향을 보이게 되는 걸까.
어린 시절 오빠와 다투면 엄마는 “네가 동생이니까 참아야지”라며 오빠 편을 들었고, 동생과 싸우면 이번에도 “언니인 네가 참아야지, 동생은 너보다 어리잖니”라며 동생 편을 들었다. 둘째란 집안의 북 같은 존재인가 싶어 억울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 늘 나만 혼나는 것 같아 불공평함을 토로하면, 엄마는 어린 내게 말씀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다 똑같이 소중하고 아프단다.”
그 말에 반박 한 번 못 하고 살았다. 그러다 장성한 삼 남매가 각자 둥지를 틀고 ‘부모’라는 이름이 하나 더 생겼을 즈음, 엄마는 고백하셨다. 사실 깨물었을 때 덜 아픈 손가락도, 더 아픈 손가락도 있노라고. 오빠는 장남이라서, 막내는 가장 어려서 늘 마음이 쓰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너는 늘 양보하고 투정도, 앙탈도 부릴 줄 모르는 말 없는 아이였잖니.”
생각해보면 엄마는 지인들에게 나를 늘 ‘말 없는 아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우리 딸은 하루에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두 마디 이상 듣기가 힘들어요. 입에 거미줄이 칠 것 같다니까요.” 누군가와 통화하며, 혹은 손님에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초중고 시절 동안 뒤통수에서 들려오던 그 말들이 어린 시절 나의 자아상을 규정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작은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고, 스스로 음소거를 한 채 살았다. 엄마에게 종알종알 속내를 털어놓거나 옆에 붙어 응석을 부린 기억이 없다.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아이의 말 한마디, 표현 하나에 마음이 기쁨의 강에 출렁거리다가 눈물 바다가 되기도 한다는 걸. 엄마에게 나는 참 속내를 알 수 없는 어려운 딸이었겠구나 싶다.

그래도 요즘엔 부모님을 뵈러 가면 일부러 말을 많이 하고 온다. 텃밭에서 키우시는 푸른 잎들을 보며 이건 무엇인지, 저건 어떻게 먹는 것인지 묻기도 하고,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도 보내드리곤 한다. 이번 가족 모임을 마치고 일주일 뒤 전화가 왔다. “네가 좋아하는 청경채가 그때는 덜 자라서 못 줬는데, 일주일 만에 엄청나게 자랐구나. 엄마 아빠 둘이서는 다 못 먹으니 좀 보냈다.” 알겠노라 답하고는 잊어 버렸다.
어버이날을 맞아 학원에서 카네이션 만들기 수업을 하느라 녹초가 된 몸으로 퇴근하고 들어오니, 문 앞에 이불 상자만큼 커다란 박스가 놓여 있었다. 분명 청경채만 조금 보낸다 하셨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봉다리 봉다리 한 가득 상추, 시금치, 부추, 미나리, 열무에 김치까지 박스 안이 온통 초록 풀밭이다.
“잘 받았어요. 이렇게 많이 보내면 한 달은 풀만 먹어야겠네.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도 없어요~”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뻐근해진다.
냉장고에 넣으려는데 봉지마다 메모가 하나씩 들어 있었다. 꺼내보니 어떻게 조리해 먹으라는 엄마의 손글씨가 습기를 머금고 울어 있었다. 냉장고에 다 들어가지 못할 이 초록들과 엄마의 메모를 보다가, 이렇게 내려받기만 하는 마음에 울컥한다.
나는, 이 나이에 아직도 엄마에게 아픈 손가락인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