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uh logo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한 작가 몰아 읽기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를 읽고

『길 잃기 안내서』라니!!!!

길치인 나에게 이 제목은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처음 솔닛을 알게 된 건 『멀고도 가까운』이라는 에세이였고, ‘비평적 에세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며 충격을 받았다. 그전에 읽었던 에세이 책을 다 버리게 할 만큼, 나는 솔닛의 문장들에 홀딱 반해버렸다. 몇 번의 이사와 해마다 하는 책장 정리 속에서도 솔닛의 책들은 ‘다시 읽고 싶은 책 코너’에 살아 남았다.

우리는 길을 잃는 것을 실패라고 배운다. 정답을 모르고, 계획이 틀어지고,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불안해한다. 하지만 솔닛은 오히려 묻는다.

정말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삶이 살아 있는 삶일까.

길을 잃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풍경

길을 잃는다는 건, 낯선 것 앞에 헤맨다는 것이다. 익숙한 길을 헤매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솔닛이 말하는 ‘길 잃기’는 방향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태도에 가깝다.

책은 길을 잃는 사람에게 필요한 기술도 말해준다. 주의 깊게 바라보는 기술.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길 잃은 상태를 편안하게 견디는 기술. 존 키츠가 말한 것처럼,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와 의문을 견디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길을 잃어서 힘든 것이 아니라,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해서 더 힘든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하고, 빨리 답을 찾아야 하고, 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살아가는 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것 아닌가. 계획은 어긋나기 마련이고, 날씨는 변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일은 늘 도처에 깔려 있다.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기술일 것이다.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10년 전의 나는 이 문장들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셋이었다가 혼자로 살기 시작한 그 해에 나는 멈춰버린 자동차 같았다. 솔닛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스스로 어디 있는지 알기는 해도 사실 길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 시간들. 나는 제대로 길을 잃었다.

그러면 지금은?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더 멀리 나아가려 할 때

나는 여전히 자주 길을 잃는다. 길치에다가 엄청난 방향치이기에.

전엔 길을 잃는 순간 정신적 혼돈이 더 크게 몰려와 마음부터 무너졌다. 또 길을 잃은 거냐며 자책하고 눈은 뒀다 뭐 하냐고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나를 인정한 뒤로는 자신에게 조금 너그러워졌다. 여전히 낯선 골목에서는 동공지진이 일어나고, 지도 앱을 들고 걸어가도 길을 헤맨다. 그래도 예전처럼 당황하지는 않는다. 이 낯섦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인생도 비슷했다. 돌아보니 나는 생각보다 먼 곳까지 걸어와 있었다. 겁도 많지만 때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이상하게 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왜 내비게이션을 쓰면서도 헤매냐며 놀림받는 나에게 길을 잃는 것이 실패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이라고 말해준 책.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책장에 남겨두고, 생각날 때마다 다시 꺼내 읽는다.

첫페이지로 이동
인스타로 이동

sosuh profile

디자인, 일러스트, 그림책 등 다양한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강의해왔습니다.
현재는 분당에서 ‘그림산책’이라는 미술 교습소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책을 만드는 다양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읽고, 쓰고, 그리는 일상을 차곡차곡 기록합니다.

Related Posts

그림자 쪽에 서서

그림자 쪽에 서서

1.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나는 책이 좋고 책 만드는 것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인생보다 혹은 인생만큼 대단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내게...

“안 슬픈데요” (달의 뒷면_2)

“안 슬픈데요” (달의 뒷면_2)

안 슬픈데요 “안 슬픈데요.” 순간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얼마 전 아이들과 생존수영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대답이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학원 근처 초등학교에서는 2학년부터 생존수영 수업을 한다고 했다....

달의 뒷면_1

달의 뒷면_1

하나의 일을 시작할 때마다 새로운 문 하나가 열리는 것 같다. 문을 열고 두 발을 들이면 전에는 몰랐던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달의 뒷면처럼 늘 거기에 있었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 미술 학원을 운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