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하나였다.
오늘 잊지 말고 해야 할 일, 하나.
그러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적은 포스트잇이 더해졌고,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생각해야 할 부분과 고민점들이 붙어지다가 점점 벽 한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지난 7월과 8월에는 3주나 병원을 다니면서 6년 전에 떼어냈던 혹 주변에 다른 혹들이 암이 되었는지 아닌지 혹은 몸의 다른 부위의 멍울들이 암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지 의심했다. 검사하고 추가하고 또 검사하며 결과를 기다리던, 3주동안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바깥의 여름이 무색하게 겨울잠처럼 잠을 잤다. 그러다 하루는 일어나 멍하니 벽면에 붙여둔 포스트잇을 다 떼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해야하는 일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일까? 두려웠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들이 내가 할 수 없는 일처럼 허무했고, 6년전 그림 그리는 것 하나만 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단순해졌던 삶이 방향을 잃고 어지러워하다 그대로 누워서 잠들어버리는 저질체력의 몸뚱아리처럼 쓸모없는 것만 같았다.

의심이 가서 검사를 추가적으로 하자고 했던 의사 선생님은 검사 결과 다행히 암은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다. 다른 부위에 넘쳐나게 많은 지방이 유독 없는 내 가슴속 덩어리들도 아직은 암이라는 이름은 아니라고 하셨다. 멍하니 흐려지던 눈동자를 거울 앞에서 다시 노려보았다. 아직은 모른다. 미래는 어떤것도 정해진게 없다. 허기가 났다. 무엇보다도 글이 고팠다. 스스로도 과하다 싶게 책을 읽어치웠다. 밑줄을 긋고 옮겨 적고 다시금 마음에 불씨를 켜보려고 탁탁 불쏘시개를 넣었다.

8월, 시작하는 학기를 준비하는 동시에 오래전에 신청해둔 프로젝트가 시작을 알리며 첫 만남을 가졌다. 내가 잘 하지 못하는 일. 그래서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 일중 하나인 글쓰기를 몇 달 전의 내가 덮썩 신청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럴때의 덮썩도 내게는 나름 기준이 있다. 정말 아무런 접점이 없을때는 보지도 않고 생각도 않는다. 관심이 없다. 그러나 몇번의 접점이 우연처럼 쌓여 어느 지점을 넘기는 순간, 마음이 동한다. 그때 몸이 움직인다. 새벽감성에서 하는 공동출간프로젝트도 그래서 덮썩 신청했다. 시작하는 디자인 사업의 출판쪽 고민을 하는 날보고 진선교수님의 추천으로 읽은 책 <커피 한 잔 값으로 독립출판>은 제목과 어울리게 커피를 마시다 쏟았다며 얼룩지고 울퉁불퉁해서 껄껄대며 넘겨보다 판권에서 본 인스타 주소를 들어갔고 책방의 고양이에 환호성을 지르며 팔로우를 눌렀다. 다락방이 있는 책방이 궁금해 꼭 가보고 싶다고 위치를 찾아보고 저장했다. 나만 알고 있는 책방쥔장이 공동출간프로젝트를 올리며 사람들을 모집할 때, 할까말까 망설이던 마음이 공동출판이라는 것에 질러버린 것이다. 공동출판이니 글을 쓰는 분량도 적을테고, 제사상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었다. 나는 저 책방에 가고 싶었다. 프로젝트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인사를 하였는데 격주로 2주마다 쓴 글들을 합평하고 출간될 책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이 모임은 총 10주 동안 진행될 것이고 코로나 단계가 낮아지면 모이기로 약속했다. 책이 나오면 출간 기념 행사도 책방에서 할거라고 했다. 6명중 4분이 이미 책을 내신 기성 작가님이셨다. 한편의 글만 어찌어찌 쓰면 되겠지 생각했던 나는 일정을 공유하고 계획을 들으며 분량이 꽤되는 세편의 글을 써야한다는 사실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지만 일단 도전해보기로 했다. 시작하기로 한 이상 대충하지 못하는 성격은 분명 또 나를 몰아칠 것이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안다. 할 수 있고 잘 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이 덮썩의 시작이 즐겁다.

이번주 안에 쓰고 싶은 글 목차 올리기. 마감 목요일. 포스트 잇이 하나 붙어졌다.
학교 수업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일들,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위해 고민해야 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을 추가로 붙이기 시작했다.
내가 하겠다고 생각하고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리고 있는 일들도 큼직하게 적어 붙였다. 기억하고 고민해야 하는 일, 자주 읽고 되새기고 싶은 문장, 이번주에 잊지 말고 해야 할 일, 포스트잇은 계속 늘어난다. 어떤 일은 조바심을 내지 말고 어느 지점까지 쌓여지기 위해 잊지 않으려 오랫동안 붙여 놓는다. 포스트잇은 금새 한 벽면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침 저녁으로 책상에 앉아 벽면을 바라본다. 내가 가고 싶은 방향,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급한 일, 잊지 않아야 하는 일, 꼭 해야 하는 일, 못하고 있는 일들을 보며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를 생각한다.

부실한 몸은 여전히 자주 바깥의 계절을 잊게 한다. 머리로 알고 있는 우선순위를 못하는 하루도 많다. 급한 일에 밀려 오래도록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본다. 저걸 다 하고 싶다고, 또는 하겠다고 욕심을 내는 스스로에게 마음이 뜨거워졌다 차거워졌다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더 자주 하자고 생각한다. 해야 하는 일은 가지치기를 해서 할 수 있고 잘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식물이 해빛의 방향으로 꽃을 피우듯이, 저 방향으로 내 삶이 기울어질 것이다. 그걸 알기에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토닥토닥해 본다. 포스트잇은 오늘도 몇장은 떼어지고 몇장은 새로 벽면에 붙여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