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책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나는 책이 좋고 책 만드는 것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인생보다 혹은 인생만큼 대단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책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내게 그런 경험이 있다. 최소한 하나의 사례를 아는 셈이어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캐럴라인 냅의 책 《명랑한 은둔자》 옮긴이의 말 첫 문장. 서점에 다녀온 후 생각이 나서 다시 펼쳐 들었다. 아니, 무슨 옮긴이의 말이 이렇게 훅 낚아챈단 말인가. 나도 책이 좋고, 책 만드는 것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인생보다 혹은 인생만큼 대단하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도 문득 돌아보면 내게도 있다. 어떤 책을 읽고 난 후의 내가 조금 달라졌던 순간. 아니, 책이 나를 바꾼 경험이.
2.
방심했다. 내가 얼마나 햇빛에 취약한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손등과 팔까지 피부가 난리다. 결국 올해도 피부과에 가서 약을 받아왔다. 햇빛 알레르기다. 햇빛 쨍한 날보다 흐린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에 안개 낀 곳에 있으면 기분이 너무 좋아 손가락이 춤을 춘다. 쨍한 날에는 그늘진 곳에 앉아 그림자를 보며 눈으로 따라 그리는 버릇이 있다. 흐려지고 옅어지는 그림자 속에서.
3.
몇 달을 작업했던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제작을 알아보고, 인쇄감리를 다녀오고,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샘플을 받으러 가고. 여기까지는 지금껏 수십 번 작업하며 겪어온, 잘 알고 있는 프로세스다. 하지만 배본사에 책이 들어가고 서점의 물류로 책이 입고되어 마침내 서점 매대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4.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핸드폰을 선호하고, 거의 모든 앱의 알람이 꺼져있는, 회색으로 틴트된 아이콘의 나의 핸드폰 화면. 며칠 전 B와 통화하다가 내가 얼마나 마이너한 취향을 가졌는지 새삼 자각했다. ‘그렇구나, 대부분은 내 반대의 성향을 선호하는구나.’ 내 개인적 취향에 관해서라면 마이너한 취향인 내가 좋다.
그런데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는 어떠한가. 아집 버리기. 그림자 속에 웅크려 보고 있는 나를 톡톡 건드려 저기 사람들이 많은 햇빛도 보라고 말해주는 이가 있다. 아주 큰 우산 속에 있는 기분이다. 덕분에 시선을 돌려 바라본다.
5.
할 일이 많다. 다음 주가 기말고사다. 성적 정리와 수기 출석부, 파일 정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읽고 싶은 책도 쌓여있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재료와 함께 쌓여있다. 피부과 약은 강해서 먹고 나면 기절하듯 잠을 잔다. 어느새 6월 중순이 넘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야 할 일들부터 하나씩.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될 것이다. 그렇게 쌓여가는 나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