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안개, 느린 인간

숲, 안개, 느린 인간

안개 낀 나무숲을 연필로 한참 사각사각 그리던 때가 있었다. 종이 앞에 온종일 엎드려 있고만 싶었던 시절. 아침이면 흰 종이 위로 닳아가는 연필의 마찰음을 남은 생애 동안 듣고 살겠노라 다짐했다가, 저녁이면 재능 없음에 울적해지기를 파도처럼 반복하던 시간들. 그러니 멋진 숲 사진이 올라오는 포스팅을 마주할 때면 마음속에 저 나무들을 보고 싶어 속수무책으로 동경이 피어오르던 나날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그때의 내가 감행한 어느 날의 돌발 행동. 내가 좋아하는...
이 나이에 하는 작은 반항

이 나이에 하는 작은 반항

성인이 되고 나서는 단발 머리가 내 트레이드마크였다. 나름 변화를 주었다고 말하면 늘 조카는 비슷하다며 ‘이모다운 헤어스타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문득 지금의 내 머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깨를 훌쩍 넘긴 긴 머리라니. 내가 언제 이렇게 길러본 적이 있었지? 내 폰에 남아 있는 어릴 적 사진을 다시 찾아 본다. 세 형제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나는 머리를 길게 땋아 양쪽으로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있다. 꼭 ‘빨간 머리...
가까울수록 흐려지는 것들

가까울수록 흐려지는 것들

또 깼다.화장실을 다녀와 시간을 확인하니 어김없이 새벽 세 시 반이다. 바로 잠들면 좋겠지만, 십중팔구는 눈이 말똥말똥해진다. 몇 번을 뒤척이다가 결국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버린다. 이쯤 되니 이것도 하나의 루틴이다. 다행히 이번 주까진 겨울방학이라 수업은 오후에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라디오를 백색소음처럼 틀어 놓고 졸았다 깼다를 반복하며 한두 시간쯤 게으름을 피우다가 천천히 하루를 시작한다. 어제도 그렇게 새벽에 깼다. 눈이 간지러워 왼쪽 눈을 비볐다. 좀처럼 간지러움이...
이번엔, 페터 비에리!

이번엔, 페터 비에리!

두 개의 이름을 가진 사유가, 페터 비에리 한 작가의 책을 거의 다 읽어갈 즈음, 책방지기가 다음 작가를 정하자며 물었다.“함께 나누고 싶은 작가나 추천하는 작가가 있나요?” 나는 책장에 ‘다시 읽고 싶은 책’ 칸이 따로 있다.몇몇 이름을 떠올리다가, 재작년에 몰아 읽었던 한 작가가 생각났다.그는 철학서에는 본명을, 소설에는 필명을 쓴다. 소설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도 같은 사람인 줄 몰랐다.『자기 결정』을 재독하며 문장마다 멈춰 서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의 책을 모조리...
무심한 겨울 끝에서 꿈꾸는 ‘봄날의 고양이’

무심한 겨울 끝에서 꿈꾸는 ‘봄날의 고양이’

무심했던 겨울, 나를 멈춰 세운 아크릴화 한 점 작년 겨울에 비하면 이번 겨울은 눈이 참 박하다. 유난히 추위를 못 견디는 나는 지난 겨울 내내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이번 겨울은 참 무심하게 흐른다. 아니다. 정정하자. 계절이 바뀌어가는 줄도 모를 만큼 내 마음이 무심했다. 무엇이 그리 바쁘다고 이토록 마음을 동동거리며 겨울을 보냈을꼬. 문득, 휴대폰이 ‘오늘의 추억’이라며 작년 이맘때 그린 아크릴화 사진 한 장을 띄워줬다.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는 풍경,...